디자인 노동자

휴게시간 보장을 위한 나홀로 노동운동기

저녁과 주말에 쉬는(정확히는 노는)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도 개인사업자를 낸 이후에도 줄곧 저녁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기면 일주일 넘게 걸릴 일이 나에게 오면 하루 이틀이면 끝난다는 클라이언트의 만족 어린 답변을 들으면 뿌듯했다.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엔 내가 꽤 손이 빠른 디자이너인가 보다 생각했고 그 점이 자랑스러웠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밤낮없이 디자인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만약 있다 할지라도 그런 일들은 애초에 기획 단계에서부터 무언가 잘못 되었거나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이 늦어진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빠르게 일을 못 해서 천천히 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밤낮없이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디자이너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에 받은 비용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정도로만 일했을 것이다.

디자인 사업자등록을 하고 2년 정도 지났을 어느 금요일 저녁에 한 단체 상근자로부터 급하게 디자인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도 야근을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금요일 저녁이고 주말에는 일을 안 한다고 소심하게 말했더니 “프리랜서 아니세요?” 이런 질문을 들었다. 프리랜서인데 주말에 왜 일을 안 하느냐며 어이없다는 말투였다. 프리랜서(free-lancer)라는 단어 속 ‘free’를 ‘시간과 공간에 제약 없이 언제 어느 때나 일을 받는 사람’ 정도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프리랜서가 상대적으로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할 권한을 준다는 의미는 아닌데. 이걸 말을 해줘야만 아는 것일까.

디자이너를 대하는 문화를 바꾸지 않은 채로 매번 촉박한 상황 안에서 발버둥 친다 한들 디자이너의 처우 개선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기획 단계에서 잘못 끼워진 스케줄의 책임을 디자이너가 떠안아야 하는 일들이 반복된다. 과도한 업무 환경을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디자이너에게도 저녁이 생기고 주말이 생긴다. 이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역에서 이제야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혹시라도 평판이 안 좋아질까 걱정되는 마음에 일정이 촉박하고 과도한 업무를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보다 유연하게 나의 상황을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 이때부터 조금씩 나만의 노동운동이 시작됐다.

첫 번째로 시도했던 방식은 명함에 업무 시간을 적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1차 방어를 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말고는 명함을 잘 보지 않았다. 괜히 첫 인상을 방해하는 것 같아 나중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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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를 활용했다. ‘저녁 6시 이후 업무 연락은 삼가해 주세요. 업무 관련 연락은 가능한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성공적이었다. 이 별거 아닌 문구가 나에게 꽤 많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수시로 오던 연락이 잠잠해졌고 최소한 카톡으로 업무시간 외에 연락하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여섯 시에서 단 몇 분만 지나도 미안하다는 문구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