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바람처럼 물처럼 e-레터를 배달하는 이야기 수집가, 훈훈입니다.

요즘 저는 <바람과 물> 6호를 공부하며 읽고 있습니다. <바람과 물>은 매호 커버스토리와 전환에 관한 분야별 고정 필진들의 원고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탈근대, 비인간존재, 생태적 라이프 스타일, 기후실천 등의 전환의 주제를 폭넓은 분야로 다루고 있는데요. 6호에는 흥미로운 글 한 편이 실렸습니다. 바로 '오이코 폴리틱스 :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입니다.

<바람과 물>은 비인간 존재들이 마음쓰이는 당신을 위한 잡지라는 정체성을 표방합니다. 비인간존재에 대한 관심은 인간중심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벗어나는 노력일 것입니다. 오늘날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되겠네요. 하지만 비인간존재에 대한 관심, 그 정체는 생각보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숲이 파괴되는 것에 맞서고, 동물실험을 반대하고, 공장식 축산을 거부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자연을 인간 삶을 위한 도구로 여기며 자연 질서를 교란, 파괴, 무시하며 인간 질서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일까요?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배치하는 것이 비인간존재를 위한 전환의 내용일까요? 더 깊어지지 못한 채 느낌과 단상으로만 존재하는 전환 시대의 정치를 한편의 글이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바람과 물>은 전환을 꿈꾸는 자들에게 언어를 선물하니까요.

오늘 '바람처럼 물처럼'에서는 <바람과 물> 6호의 커버스토리 중 최유미님(수유너머 104 연구원)의 글을 나눕니다.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생태동아리 청소년들과 만났다. 지금까지 몇 차례 만나는 동안 각자를 소개하는 자리도 갖지 못했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에 1시간 가량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쌤~ 안하면 안되요?" "소개할 거 없는데..."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소개인데, 그 시간만 되면 아이이건, 어른이건 자기 순서가 다가오면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기 소개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소개를 돕는 몇 가지 질문을 준비했다. 물론 몇 학년 몇 반 누구누구 라는 식의 뻔한 소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컸다. 의도보다 더 큰 건 정말 아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10개쯤 되는 질문 중 유일하게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대답한 질문이 있었다. '내가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모두 키우던 동물이 아프거나 죽었을 때라고 답했다. 물론 키우던 동물은 강아지이기도 했고, 고양이이기도 했고, 햄스터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럼, 이 아이들은 비인간존재와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겨울, 초등학생들과 함께 생태글쓰기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물론 생태 파괴 이슈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글쓰기는 아니었다. 담당 선생님은 아이들이 비인간존재에 대한 마음을 갖기 이전에 비인간존재를 온 감각을 동원해 느끼는 연습(상상)을 하길 바란다고 수업의 의도를 전해왔다. 이를 테면 한 달 넘게 산불이 나고 있다. 온 마을이 불타고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대화체로 옮겨보는 식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상은 한계가 있었다. "온 몸이 뜨겁고 연기에 숨이 막혀요." 산불에 불타 죽어가고 있는 새들의 이야기를 아주 '인간적인' 대화로 상상해 냈던 것이다. 누구도 "짹짹짹짹!!!"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표현해내진 않았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인간성을 드높이는데 바쳐진 우리의 근대는 인간 이외의 나머지 것들의 세계, 수많은 비인간들이 함께 만들어온 세계를 지워버렸다. (중략) 우리 문화는 세계를 혐오하는 것이 틀림없다"(최유미, <바람과 물> 6호 중에서)

비인간존재에 마음이 쓰인다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마음 쓰는 비인간존재는 가까이 살고 있는 반려동물인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학대당하는 동물들,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종들이 있지만 그것 또한 동물들에 한정된 경우가 많다. 그건 아마도 그들에게도 인간과는 다르지만, 인간과 유사한 감정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가지지 못했다고, 타인이 없다고, 행위능력이 없다고, 자연의 필연성에 붙잡혀있다고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간주되어 온 비인간들의 단순하고 분명한 반응reaction이야말로 오이코스를 박차고 나오려는 강력한 정치행위임을 주장한다. 서양 전통 철학은 말을 갖지 못한 비인간은 단지 반응할 수 있을 뿐이지만, 말을 가진 인간들은 응답response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응답이야말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식별자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비인간도 응답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응답은 말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에 비인간도 나름의 말이 있다고 애써 그들의 로고스를 증명해보이려는 것은 응답과 반응의 구분 그 자체를 의문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유미, <바람과 물> 6호 중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 있어서 비인간존재를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근대적 폭력성에 의해 파괴되는 대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폭력은 고대에도 이미 있어왔다. 최유미가 인용한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는 폴리스와 폴리스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오이코스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오이코스에 소속된 자들은 여성, 어린이, 노예들이었고 그들은 자연의 필연성에 붙잡혀 있는 자들이고, 그들이 내뱉는 말은 소음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소음이 폴리스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면 그리스의 폴리스 정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철저히 지워졌다. 그래서 랑시에르에 따르면 폴리스의 정치는 "치안polis"이지 정치가 아니다. "치안은 어떤 행위, 어떤 존재 양식, 어떤 말에는 정당한 자격이 부여되지만 다른 행위, 다른 존재 양식, 다른 말은 자격을 박탈하게 만드는 질서이다. 이 질서에 따라 누구의 말은 담론이 되지만 다른 누구의 말은 소음일 뿐이고, 어떤 것은 보이지만 어떤 것은 있어도 보이지 않게 된다."(최유미, <바람과 물> 6호 중에서) 반면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나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도록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근대의 인간성은 오이코스에서 인간을 건져냈지만 오이코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이제 비인간존재들만이 남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전환을 말하면서 비인간존재에 마음을 써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말없는 배경이자 미성년인 자들, 수도 없이 지워졌던 비인간의 세계가 이제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다. 기후격변은 이들 비인간의 세계가 우리의 문화를 위협하고 난입한 사건이다. 이를 통해 그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게 되었다. (중략) 우리는 드러나지 말아야 했던 것, 드러나기를 금지당했던 것들이 기후격변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를 비인간이 주도하는 정치, '오이코폴리틱스oikopolitics'라고 명명한다. (중략) 오늘날 생태학 혹은 생태주의는 인간과 비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목표로 여러 담론들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오이코스'라는 말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정치에서 지속적으로 지워졌던 공간, '오이코스'에서 다시 출발해 비인간의 정치를 생각하기 위함이다."

최유미, <바람과 물> 6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