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9:12-16
적응이라는 말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나 추운 날씨에 적응하는 것은 이롭습니다. 빨리 적응해야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고, 적응해야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부조리나 불평등의 문제는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부조리하다고 느꼈고, 처음에는 부당하다고 느꼈는데 유별나게 저항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나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잠자코 있다 보면,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적응해 버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불평등하고 부조리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그렇게 인식하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1662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왕이 된 이후에,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른바 '난로세'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부자증세인데, 부자들이 큰 집을 짓고 방이 여러 개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난로세를 부과했습니다.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난로 하나당 1년에 약 63만 원 정도로 세금을 매겼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을 발표하자마자 조세 저항에 직면합니다.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대항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방문을 열어줘야 집에 들어가서 난로 개수를 세고 세금을 부과할 텐데,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로세는 폐지되었습니다.
1696년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창문세를 신설했습니다. 역시 같은 맥락으로, 부자증세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창문세는 난로세와 달리 밖에서 보면 창문 개수를 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표시로 집에 벽돌로 창문을 막아 두고, 합판으로 창문을 막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세금 부과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그마치 150년 동안이나 이 세금이 유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창문을 막고 지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영국의 날씨가 우중충하고 햇볕 보기가 힘든데, 오랫동안 어두운 집에 살면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전염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50년 동안 욕하면서 세금을 냈습니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영국에서 창문세로 짭짤한 수입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 16세가 창문세를 신설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루이 16세의 실정이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시민 재판에 넘겨져 처형됩니다. 저항한 사람과 저항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토록 큽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데, 영국 시민들은 가만히 있다가 150년 동안이나 부당한 세금을 내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달랐습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유별나 보일까 봐 그러다 보면 롯과 롯의 가정처럼 불행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 성에 두 분의 천사들이 왔습니다. 롯은 그 두 분의 천사를 가정으로 영접했고 무교병을 대접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소돔 성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막을 수 없게 되어서 두 천사가 그들의 눈을 일시적으로 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는 소돔 성의 심판이 임박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창 19:12-13)
드디어 소돔 성에 온 두 사람이 그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성을 멸하리라." 그런데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이 두 천사가 성을 멸하기 전에 롯에게 "너의 가족과 너에게 속한 사람을 이끌어 밖으로 끌어내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데, 롯과 롯의 가족에게는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무엇 때문에 이 성이 멸망당하는데 롯과 롯의 가족은 이토록 챙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19:29)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생각하면 롯을 그냥 그곳에서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었는지, 아브라함이 롯을 얼마나 극진하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롯과 그의 가족을 한꺼번에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롯과 롯의 가족이 이렇게 기회를 얻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과연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어떤 개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우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구주로 영접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야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롯과 롯의 가족, 두 딸과 아내, 이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그들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했습니까?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본질적인 차원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문에 이들에게 한 번 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 성의 라합과 그의 가족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수 6:25)
라합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말씀 듣고 마음이 움직였고, 믿음이 생겨났고, 그리고 실천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의 가족들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 형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라합을 생각하셔서 그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통해서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별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구원을 위한 기회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롯과 그의 가족을 특별하게 사랑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 내셨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사랑하는 가족들, 내 친구들, 일가친지들, 이름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그 영혼을 위해서 중보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