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8:9-16
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자들 중에 무신론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신적 존재를 인정하거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학자답지 못한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진정한 과학자라면 보이는 세계에만 집중해야 하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을 거치면서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이후, 과학자들 중에서도 신적 존재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생을 바쳐 하나의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 백 개의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그 백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다시 천 개의 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피조 세계가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데, 인간의 좁은 소견과 지혜로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백 퍼센트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 가운데 73퍼센트가 암흑 에너지이고 23퍼센트는 암흑 물질입니다. '암흑'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판단하거나 분별할 수 없기에 '암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제 4퍼센트 정도가 남았는데, 그마저도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먼지와 기체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그 가운데 0.4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가 우주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혜로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허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이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질문한 기자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대답 같지만, 그로서는 가장 현명하고 당연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연구하고 자신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다음 세계를 끝까지 증명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과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인도해 가시는지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어느 한 단계에 부딪히면 그다음은 힘을 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따라가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 18:9)
아브라함은 나그네 세 분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이분들이 평범한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인 나그네, 지나가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의 아내 이름이 사라인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은 아브라함의 아내가 사라인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극진히 섬기고 대접한 이분들이 평범한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이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아브라함은 확신했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왜 하나님인 것을 확신했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르 땅에서 그들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몸에서 날 자라야 내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할례의 언약을 위해서 그를 찾아오셨을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말씀을 지속적으로 하시는 분은 자기 인생의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피상적인 논리로만 읽으면 아브라함 가정이 가장 필요로 하던 선물, 곧 아들을 선물 받은 이유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고, 치즈를 대접했고, 우유와 떡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극진히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혹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성실하게 잘 해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쉽게 유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큰일 납니다.
창세기 18장을 넘어 창세기 전체의 흐름을 보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천사들과 하나님을 잘 대접해서 소원 성취했다면, 성경 전체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 그러면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로 도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다루는 신약의 한 구절을 봅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이 전부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한 것은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종교 안의 아버지, 좁은 소견의 아버지가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로서, 공주의 어머니가 아니라 열국의 어머니로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중에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사건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렇게 대접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셨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주시고 믿음의 백성을 이루기로 작정하셨고, 그 흐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좁은 소견으로, 혹은 인간의 얄팍한 술수와 계획으로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주를 운행하시는 데 있어 당신의 섭리와 계획대로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를 줄 계획이 없었는데 대접을 잘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 가정의 소원을 성취해 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쉬운 분,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