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7:18-27
지난 2020년 국정감사에서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국은행 본관의 정초석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정초'라는 두 글자를 자필로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느냐, 알았다면 왜 방치했느냐, 이제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두고 정치권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처리 방안을 두고 오랜 공방이 있었습니다. 철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대로 두자는 사람도 있었고, 길바닥에 깔아서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결론은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후세대들이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역사에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아픔의 역사도 있습니다. 눈 감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떼어내고 없앤다고 해서 그 수치와 굴욕의 기록까지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정면으로 응시하고, 살펴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서울 송파 석촌호수 주변에 가면 삼전도비가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1639년에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정복하고 인조 대왕의 항복을 받은 기념으로 세운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고종이 왕이 되면서 보기 싫다고 한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1913년에 일제가 다시 비석을 건져 올렸습니다. 조선이 본래 외세의 침략과 압제를 받아온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굴욕을 주기 위해 버젓이 전시해 두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주민들이 그 비석을 보기 싫어 땅을 파고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1963년 대홍수가 나자 땅에 묻혔던 비석이 다시 드러났습니다. 그때 정부는 비석을 한강에 넣지도, 없애버리지도 않고, 아예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전시했습니다.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또한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역사는 인간의 실수와 죄에 의해 한순간 굽어가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통해서도, 전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풀어가시고, 해결하시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걷기로 결정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주지 않았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13년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과 별다른 교제 없이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는 그에게, 문턱에 머문 그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시며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오셔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존귀한 아버지'가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사래'를 '사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공주와 여왕으로 군림하던 자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어 품고 섬기고 먹이는 자가 되라 하시고, 할례하라고, 내 언약을 맺자고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그 이야기를 듣다가, 92세 된 자기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웃음,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었습니다. 쓴웃음이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체념의 웃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 큰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자기 믿음의 창고가 텅텅 비는 줄도 모르고, 믿음의 얼음이 녹아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웃고 난 후에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설명하고 알아듣게끔 말씀하셨는데, 이런 말을 들으시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힘이 빠지셨겠습니까? 대화를 하다 보면 진도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문제를 풀어갑니다. 잘못한 것을 사과합니다.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이렇게 한번 해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일이 잘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합의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면 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제자리입니다.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대화 상대를 만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시는 이 사람과는 말 않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힘이 빠지지 않겠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13년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할례 언약을 맺으라 하시고, 아내를 통해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아브라함의 반응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을 '문턱에 주저앉아 있는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조금만 더 가면 금은보화가 있는데, 도끼로 땅을 파면 엄청난 것이 있는데, 얕은 물가에서만 헤엄치고 있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독이나 코치가 볼 때 이 단계만 뛰어넘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데,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데,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딱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자가 손을 뻗어서 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내미는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턱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안 된다고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2)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경제활동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2000년 전 그 시대에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인지 동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그를 날마다 메어다가 성전 문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 살라고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이 많은 미문 앞에 이 사람을 매일 데려다 놓았습니다. 아침이 되면 집에 가서 이 사람을 메고 거기에 데려다 놓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시 집에 모셔다 주었습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했습니다. 아마 이 친구들은 보람 있었을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친구를 먹고 살게끔 도와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알고 더 중요한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문턱에 매일 이 사람을 두었습니다. 성전 문턱을 넘어가면 바로 성전인데, 성전 안으로는 단 한 번도 이 사람을 데려다 준 적이 없습니다. 성전 문지방만 밟게 하고 성전 미문에 매일 이 사람을 두고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해 주었을지 모릅니다. 배가 고픈 것,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게 해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람의 영혼 아니겠습니까? 매일같이 이 사람을 메어다가 미문에 두면 오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주어 먹고사는 것은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이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살다가 생명이 다하면 이 사람의 영혼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