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7:15-17
한여름 뜨거운 무더위에 수박화채를 먹으면 무더위도 사라지고 갈증도 해소됩니다. 그런데 수박화채를 더 시원하게 먹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채에 넣는 얼음 알갱이를 작게 쓰면 열용량 때문에 빨리 녹아서 더 시원해집니다. 반대로 얼음 알갱이가 크면 잘 녹지 않아 덜 시원해집니다. 우리 조상들은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석빙고를 운영했습니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도 한여름에 얼음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석빙고 덕분이었습니다.
한강변에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고, 전국 곳곳에 석빙고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형체가 잘 보존된 것이 경주 석빙고입니다. 석빙고에는 한겨울에 언 얼음을 큰 덩어리로 저장해 두었습니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볏짚을 넣고, 복사열로 인해 쉽게 녹지 않도록 환기장치를 갖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석빙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얼음의 덩치와 크기입니다. 큰 얼음을 두면 여름 내내 사용해도, 더위에 조금 녹더라도 무사히 여름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사용하고 녹은 만큼의 얼음을 다시 채워 넣으며 석빙고를 운영했습니다.
석빙고에 있는 이 얼음의 단단함과 크기를 오늘 우리의 믿음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석빙고 안의 큰 얼음처럼 단단하고 덩치가 크다면, 악한 사탄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뒤흔들어도 쉽게 녹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수박화채 속 얼음 알갱이처럼 작고 연약하다면, 사탄이 흔들어 놓으면 주변 상황과 세상 시류에 따라 녹아버리고,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믿음의 크기와 단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을 통해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5-16)
하나님께서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존귀한 아버지였던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하셨고, 이제는 사래를 사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래는 '공주' 혹은 '여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여주인', '여러 민족의 어머니', '열국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바꾸라고 하신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의 대표인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꾸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라고 하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가정의 일치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동역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열국을 섬기는 아버지로서 자기 가정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섬기고 돌봐야 하는데, 부인인 사래가 여전히 공주로, 여왕으로 산다면 가정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자동차가 굴러가려면 바퀴가 똑같은 크기여야 합니다. 한쪽 바퀴는 크고 다른 쪽은 작으면 힘을 줘서 굴려도 제자리만 뱅글뱅글 돌 뿐,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정의 부부가 똑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비전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되고 사라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마음껏 일을 맡겨주실 수 있습니다. 한때 사래는 공주처럼, 여왕처럼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기 몸종 하갈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하자 견딜 수 없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여종 하갈을 학대하고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사래였기에, 공주였기에, 여왕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사라가 되면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동역과 가정의 일치를 통해 그들에게 맡겨주실 일이 앞으로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일치와 두 사람의 동역을 통해 크고 위대한 일을 많이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가정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일생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일생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이 그토록 위대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절반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덕분에 바울은 위대한 사역을 이루게 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처음 만난 곳은 고린도였습니다. 그때 그들의 생업이 같았습니다. 천막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생업이 같았을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도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바울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 사람 바울을 통해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겠다고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바울을 섬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행 18:24-26)
아볼로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생 같은 사람입니다. 집안도 좋고 많은 학식이 있었지만, 예수에 관한 것과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더 깊은 세계, 더 깊은 성령의 세계, 영적인 세례에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그의 자질이 훌륭했기에 불러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제대로 세우면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초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가 깨닫게 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 목회자가 비어 있었는데, 1대 목회자가 바울이었고, 두 번째 목회자로 아볼로를 파송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복음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고, 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아볼로라는 위대한 인물을 길러내어 고린도교회 사역자로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로 가고 싶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먼저 가서 그곳을 개척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워두고, 바울이 와서 설교만 하면 되도록 모든 제반 문제와 상황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3년 동안 눈물로 복음을 전해 에베소가 위대한 복음의 현장이 되도록,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먼저 터전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바울이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이미 로마에 가서 바울의 사역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롬 16:3-5a)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가정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불모지에 들어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워 놓았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로마에 오면 그 성도들을 기틀로 삼아 교회를 세우라고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바울의 사역이 위대해졌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은 귀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