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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끝나는 명료함을 선호하는 한국 사회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모호함투성이다. 편집 디자이너에서 UX/UI 디자이너, 인하우스에서 프리랜서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포괄하는 매체의 직군과 범위가 다양하고 그 특성도 다른 만큼, 한 디자이너의 생애 커리어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기엔 빈 공간이 많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년이라고 말하는 60세, 65세까지의 경험을 쌓은 선배 여성 디자이너들이 잘 보이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약 2백8십만 명의 감염자를 기록할 무렵이던 2020년 4월 25일, FDSC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우멘토(WOMENTOR) 행사의 한국 대표로 <디자인 이모고모>(부제: 시니어 디자이너, 우리 계속 일할 수 있을까요?) 웨비나(Webinar) 행사를 개최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25년 경력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니어 디자이너 다섯 명의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들으며 오랜 시간 쌓아온 유·무형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는 자리였던 <디자인 이모고모>는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시기에 걱정보다는 가볍고 단단한 마음으로 다가올 미래를 구상할 수 있게 했다.

1. 이모, 고모, 할머니, 그리고 조상님

2000년대 초,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의 디자인과 개설 수와 그에 따른 학생들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행사 제목인<디자인 이모고모>를 보며 새삼스레 그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이 이제는 30대, 40대가 되어 누군가의 디자이너 이모, 디자이너 고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늘 회자되는 디자인 교육의 성비 불균형을 무의식/의식적으로 인지하며 살아가는 여성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도 ‘디자이너’ 단어 앞에 붙은 ‘이모’와 ‘고모’라는 단어는 신선한 낯섦으로 다가왔다.

이 단어는 자연스레 멀게는 학부 시절, 가깝게는 여전히 디자이너로 일하며 보고 겪고 듣는 근래의 사례들을 떠올리게 했다. 2010년대 초, 내가 다녔던 학교의 디자인 학부 교수진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학생들의 대부분은 여성이었지만 학과 대표나 조교 등의 역할은 주로 남성에게 주어졌다. 오랜 시간 자연스레 정착된 ‘형님 문화’는 학번과 연령을 초월한 어떤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알게 모르게 남성 디자이너가 더 주목받고 안정적으로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이번 행사 제목에 사용된 ‘디자인 이모’, ‘디자인 고모’라는 단어는 이런 형님 문화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앞으로 더욱 널리 쓰여야 할 새롭고 신선한 호칭이다. “이모, 고모, 할머니가 될 때까지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라는 행사의 소개 글처럼, 지금의 디자인 이모, 고모들이 할머니, 조상님이 될 때까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

2. 서울과 non-서울, 결혼과 비혼

〈디자인 이모고모〉는 경력별, 분야별로 연사를 고루 구성한 것 외에도 서울 외 도시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역에 대한 고려 역시 세심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산업과 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디자인 실무 인력의 대부분이 주로 서울에 집중된 것은 사실이지만,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긴 시간 전문 경력을 이어가며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소중했다.

그리고 결혼한 디자이너와 결혼하지 않은 디자이너의 경험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다양한 형태로 청년기 이후를 살아가는 여성 디자이너들의 경험과 선택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신선한 부분이었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제에 편입되지 않고서도, 혹은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도 사회 구조 내에서 여성 디자이너로 혼자 일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용기를 주었다.

3. 디자이너로서의 자립은 경제적 자립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트렌트에 쉽게 영향을 받는 디자인 업계이기에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하지만 다섯 디자이너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통점은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였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외에도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명확히 정리된 후에 선택한 행동—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결과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계기일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긴 시간 스스로를 발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추동력이었다. 단순히 취향의 좋고 싫음이 아니라 디자인을 좋아하고 잘하고 싶고, 오래 하기 위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잘하고 싶은 것을 명확히 인지하는 태도가 디자이너로서 자립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