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언약

본문: 창세기 17:9-14

고대 로마가 지켜온 외교의 원칙은 '당신이 나에게 주면 나도 준다'는 상호주의였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을 고려하면 이러한 접근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필요한 것을 빼앗으면 될 터인데, 왜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펼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기원전 493년 라틴 동맹을 결성할 때부터 시작하여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거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거란의 요구는 명확했습니다. 평양을 포함한 북쪽 지방의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원하는 것을 주고 목숨이라도 보전하자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달랐습니다. 일단 만나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협상이 안 되면 그때 땅을 내줘도 늦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서희가 협상 테이블에서 만나보니 거란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와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후미를 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란의 의도를 알아챈 서희는 먼저 제안을 던집니다. "당신들이 송나라가 고민인 것처럼 우리의 고민은 여진족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강동 6주를 주신다면 우리는 여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들이 송과 전쟁할 때 우리는 송을 돕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왕이 거란의 왕을 찾아가서 인사도 드릴 수 있습니다." 소손녕은 기뻐하며 돌아갔고, 실제로 강동 6주가 고려에게 돌아왔습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거란이나 고려나 똑같이 승자입니다. 외교 관계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기 때문입니다.

서희가 훌륭한 것은 단순히 강동 6주를 받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의 의중을 알아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약의 본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여러 차례 맺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는 언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맺으시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저 살을 베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할례의 언약을 행하라 하시는가, 하나님의 본뜻과 의중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할례 언약의 깊은 속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끊어내고 결단해야 할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9-10)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가족들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대대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할례 언약은 후손 대대로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확정됩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1)

살가죽을 베어내야 합니다. 마취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살을 베어내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멀쩡한 살을 잘라내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때 찾아오셔서 그에게 할례를 요구하시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살가죽을 베어내어서 그것을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끊어내고 결단하는 것이 할례의 본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요구하시는 것, 할례의 본뜻은 '잘라냄'입니다. 끊어내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할례, 잘라내고 결단하고 끊어내는 것은 이전에 아브라함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빠져서 13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13년 동안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한 사람에게 빠져서 종기 한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는 열국의 아비가 되라 하시고 아브라함이 되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되려면 지금까지 우상처럼 섬기고 있던 이스마엘, 그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던 이것부터 잘라내지 않으면, 이것부터 끊어내지 않으면, 이것부터 결단하지 않으면 너는 결단코 아브라함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 마음속에는 하나님 아닌 이스마엘이 우상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정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언약 이후에 결단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살을 잘라내는 아픔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스마엘이 어떤 아들입니까? 하갈이 어떤 여인입니까? 그런데 할례 언약 이후에 하나님보다 더 섬겼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 후에는 이삭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내 아들, 내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다음 일생은 할례 언약 이후에 끊어내고 잘라내고 결단하는 것이 그의 일생 전체의 과제요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의 핵심은 끊어내는 것입니다. 정리하고 잘라내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으고 챙기고 쌓아두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지렛대 삼아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분들은 매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하고 끊어내고, 무엇을 끊어낼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내 마음의 우상은 무엇인가, 이것을 살피고 깨닫고 항상 버리고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 가치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9)

이 중에 버리기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 중에 '이것은 아깝지 않으니 나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집도 아까운 것 아닙니까? 버리기는커녕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신앙생활하지 않습니까? 좋은 집 달라고, 좋은 땅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매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끊어내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 땅에서는 버려야 하고 그 보상은 천국에서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