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6:16-17:1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편년체 서술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기전체 방식입니다. 편년체는 연월일시에 따라 일어난 사건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관이 곁에서 지켜보며 마치 일지를 기록하듯 모든 일을 담아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대표적인 책이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이고,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사관이 역사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의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왕의 입에서 나온 말, 신하들의 발언,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러나 단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의미 없는 것까지 다 기록하므로 양이 방대해진다는 것입니다.
기전체 방식은 왕의 업적, 제후들의 업적, 그리고 그 당시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열전으로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그렇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이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기전체 역시 장단점이 분명합니다. 사관이 역사를 평가하므로 읽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관의 성향에 따라 역사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관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역사관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사실로서의 역사가 의미로서의 역사로 바뀔 때 변질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을까요? 엄밀하게 따져보면 성경의 사관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미의 책이고 가치의 책입니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성경이 다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만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왜곡의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사관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살펴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기록하신다면 기록할 거리가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서 단 한 줄도 기록할 여지가 없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갈이 집을 나갔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서 사래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시며, 가진 아기는 아들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대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온 하갈을 맞이하는 사래도 이전처럼 함부로 하갈을 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갈의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갈의 하나님이기도 하기에 이전처럼 하갈을 학대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갈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이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두 여인이 다투지 않습니다. 멸시하지도 않고 압제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브람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아들을 안아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6:16)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나이가 칠십오 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아브람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의 약속이고 또 하나는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사실 땅의 약속에 대해서 아브람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방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본부인 사래를 통해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브람은 그 아들에게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을까요?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 년 이 년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십삼 년 동안이나 아들 이스마엘에게 흠뻑 빠져서 살았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마감할 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아브람은 구십구 세였습니다. 그러면 십삼 년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우리는 16장 16절과 17장 1절을 한 호흡에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16장에서 17장으로 넘어오는 이 지점에는 십삼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십삼 년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역사를 편찬하시고 성경의 사관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람 인생의 십삼 년은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의 인생 십삼 년은 단 한 줄도 기록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 입장에서 십삼 년은 어떤 기간입니까? 아브람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이 십삼 년의 시간은 일생일대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던 아들을 안아본 순간이었고, 아들의 재롱을 보는 시간이고, 아들이 성장하고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모처럼 이 가정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항상 갈등이 있었고, 항상 어둠이 있었고, 항상 그늘이 있었던 가정이었는데, 이제는 어둠도 그늘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단 한 줄도 기록할 가치가 없는 시간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복을 질투하시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행복하기를 가장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람의 십삼 년을 기록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세운 언약을 아브람이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고민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가십니다. 짐승을 잡으라 하시고 쪼개어 놓으라고 하시고,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이 되어 그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만약에 내가 너와 맺은 언약,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여기 이 짐승들처럼 나는 쪼개져도 좋다고 하시며 아브람과 쪼개짐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언약 이후에 돌아서서 16장에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언약을 붙잡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 언약의 주인 되어 주시고 한 번도 그 언약을 변하려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시는데, 아브람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행복에 겨워합니다.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 등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은 가치 없다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신문이나 언론 매체에서 기대수명이라는 단어를 가끔 접합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별다른 사고 없이 문제없이 자라면 몇 살까지 살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 기대수명입니다. 의료기술이 발전했고 약이 좋아졌습니다. 요즘 태어나는 남자아이의 기대수명은 80.5세이고, 여자아이는 86.5세입니다. 평균이 83.5세입니다. 요즘 태어나면 적어도 83~84세까지는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조선의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습니다. 왕들의 수명이 46.1세라면 그 당시 노비들, 가난한 사람들, 일반 평민들, 전쟁과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환갑잔치를 했지만, 이제는 팔순잔치도 민망해서 잘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