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적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가끔씩 뒤집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고대 세계 감각적 사고에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다를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망망대해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배를 타고 끝까지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낭떠러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낭떠러지 끝에 떨어지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에서 배 타고 멀리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1543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그 책을 발간합니다. 물론 그가 젊어서 지동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가톨릭 세계관에서 그 책을 내었다가는 목숨이 온전치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묵혀 두고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책을 출간합니다. 하지만 그 책의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사람들이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609년에 천재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정당했음을 실험으로 입증합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632년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습니다. 법정에 서서 가톨릭, 그들의 종교 권력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게 됩니다. 하지만 지동설이 천동설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의 지평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빛에 대한 이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거치면서 빛은 입자라고 믿었습니다. 작은 알갱이가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빛은 파동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닐스 보어 같은 과학자들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닐스 보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다. 두 가지가 상호보완적이다.” 상보성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상보성의 원리는 현대물리학, 양자물리학의 뿌리가 되고 근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바뀌어지는 것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고 굉장히 힘겨워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고대 시대 사람들은 손가락 열 개를 가지고 수를 셌습니다. 그런데 종이가 발명되고 필기구가 발명되고 나서는 종이에 수를 쓰면서 계산을 합니다. 조금 더 지나면서 주판으로 계산을 합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며 간단한 전자계산기가 발명됩니다. 조금 더 현대화되면서 컴퓨터로 계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컴퓨터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내가 지금까지 절대 가치로 믿었던 것들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급속도로 변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어디에 내 지평을 잡아야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사람들은 모두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으로 옮겨 오면, 우리는 다 신앙인들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불변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하루아침에도 열두 번도 더 바뀝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존재 근거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야말로 영원토록 불변하신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고 장차 오실 우리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존재 지평이 무너지고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은 변함없음을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시고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하룻밤을 모처에서 유하시고, 그리고 날이 밝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들어오시다가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발견합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님께서 며칠 전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소서, 예수님 당신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가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보기에는 멀쩡한데 속이 곪아 있고 썩어 있으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곧 말라 비틀어지고 파괴될 것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 제적 예언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후 70년이 되면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들어와서 성전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하는 사건이 곧 닥쳐오게 됩니다. 지금도 성지에 가면 파괴된 성전이 그대로 있습니다. 성전은 다 무너져 내리고 서쪽 성전 벽만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통곡의 벽입니다. 그렇게 통곡의 벽 하나만 남아 있고 성전이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처럼 성전이 온전히 다 파괴되고 다 쓰러져 버리고 없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태어나자마자 난지 8일 만에 나와서 성전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와서 유월절 그리고 그 외에 여러 명절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립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 성전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이 파괴되고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끝나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성전을 재건한 일이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가장 먼저 학사 에스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나라가 망한 이후에 흩어져 살아갔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와서 순례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가장 훌륭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성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기뻐하고 그들의 삶의 존재 근원이고 존재 지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이제는 가나갔습니다. 타락한 성전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짐승을 사고팔고 돈을 바꾸고 거기에서 뒷돈을 받아서 누리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들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성전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처럼 이 성전이 파괴되고 나면,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전이 다 사라지고 없는데.
오늘 이 질문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고민과 굉장히 닿아 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 130년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초기 선교사님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척박했습니다. 미개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전 세계 지구상에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병원이 들어왔습니다.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개화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방방곡곡에 들불처럼 퍼져 갔습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날로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부흥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교회가 방방곡곡에 넘쳐납니다. 신학교가 호황을 누립니다. 목회자가 양산되었습니다. 어떤 동네들은 교회가 커피숍보다도 많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권력자들이 몰려들면서 돈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목회자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종교인들이 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합니다.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 내가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교회에 내가 왜 있어야 되는가? 교회를 떠납니다.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이 곳곳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나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 교회를 내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나는 절대로 교회를 떠날 수 없다. 죽더라도 교회와 함께 죽어야 되겠다. 이 두 부류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부류의 성도들 모두가 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떠났으면 행복해야 되는데, 박차고 나갔으면 마음이 기뻐야 되는데 불행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항상 아리고 쓰립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성도도 기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며 어떻게든 개혁해 보려고 하는데 힘에 겹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길을 잃었습니다. 두 부류 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떠났으면 행복하고 남아도 행복해야 되는데, 두 부류 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믿음의 뿌리까지 들어갑니다. 내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가?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가? 착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 생활을 잘하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성도들이 많이 모이고 예배당이 넓어져 가고 교회에 땅이 넓어져 가면, 그러면 나도 덩달아서 믿음이 높아지고 기뻐지고 하나님이 내 믿음도 귀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착시 현상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하고, 내 믿음이 더 깊어지고 내가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건 착각일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불일 듯 일어났는데, 성도들은 모두가 '나도 교회가 성장하는 것만큼 내 믿음도 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지금 이 마당에 와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는 이 마당에 와서 살펴보니 이제 그것이 진실이 다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어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인들, 썩어 빠진 성전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나면 그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이 질문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한 가지 방향을 주십니다. 그 방향은 절대 불변의 방향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