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하에 복종하라

본문: 창세기 16:7-10

2014년,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우리나라에서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구입했고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 읽어본 사람들은 이내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만만치 않습니다.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하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까지 두루 섭렵해야 비로소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어려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어떻게 그토록 많이 팔린 것일까요? 사람들이 읽어보면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소문도 났을 텐데 어떻게 그토록 많이 팔리는 것일까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정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인지, 나는 정의롭게 살고 있는지, 그것조차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보고 한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했습니다. 언론과 매체들을 보면 '절차적 정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절차적 정의'는 언론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닙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개념입니다. 과정과 절차가 정의로우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도 정의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유아를 둔 가정에 국가가 양육비를 지급한다고 합시다. 그 발표를 들은 부모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국가가 자녀를 키우는 데 양육비를 지급한다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재원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국가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거나, 장애인에게 지급해야 할 예산을 함부로 삭감하거나, 국방 예산을 무리하게 줄여서 재원을 만든다면, 이미 절차적 정의는 훼손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도 정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절차적 정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기와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이 일을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하나님은 주목하여 살피십니다. 만약 절차가 잘못되었다면 고치라고 하십니다.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다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과정에 충실할 것을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하갈의 과정이 잘못되었음을, 그 절차가 틀렸음을 지적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과정 가운데 있는지, 혹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래는 격분했고 남편에게 따졌습니다. 남편은 "당신 수하에 있는 여인이니 당신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래가 아이를 얼마나 기다려 왔습니까? 자녀 낳기를 그토록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하갈도 원래 애굽 여인인데, 아브라함의 가정에 들어와서 주인의 아이까지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집을 나간 하갈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은 애굽인데, 막상 나와 보니 광야와 사막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샘 곁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7)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하갈은 그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도 가도 사막인데, 끝간데 없는 광야 한복판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일단 하갈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갈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그 중요한 말씀을 건네주셨습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 16:8)

질문이 오가고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질문을 했느냐, 어떤 대답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왜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잊어버린 정체성의 회복

이렇게 부르시는 것은 하갈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갈이 자기 정체성이 '사래의 여종'인데, 임신하고 나서 자기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그녀는 임신하기 전에도 사래의 여종이었고 임신한 후에도 사래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해졌습니다. 주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런 하갈에게 "너는 사래의 여종 하갈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갈을 비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너는 사래의 여종 하갈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갈이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의 종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바로가 선물을 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은금과 패물과 각종 가축과 노비까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노비들 중에 한 여인이 바로 하갈이었습니다. 원래 고향은 애굽인데, 먼 가나안 땅까지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갈을 아껴 주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기도 했고, 사래는 하갈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살펴본 결과, 괜찮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갖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변했습니다. 참 성실하고 괜찮았는데,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변질된 사람, 변한 사람을 많이 봐 왔을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돈 없는 것 빼고는 사람 자체는 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일확천금을 하고, 갑자기 돈을 벌게 되고, 벼락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나니 사람이 변했습니다. 말투도 변하고, 거만해지고, 눈빛도 변하고,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다시는 저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도 변하고 집단도 변합니다. 20세기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지냈고, 20세기 중반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잿더미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였습니다. 하루 한 끼 겨우 먹을까 말까, 불과 한 세대 전에 그랬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