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왕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헨리 5세입니다. 헨리 5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이전의 영국과 이후의 영국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영국은 미미한 섬나라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에는 유럽 대륙에 군림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헨리 4세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들의 성격이 소심하고 유약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그 당시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나서 헨리 5세는 1413년 왕이 됩니다.
실제로 그가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전쟁을 그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측근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걱정은 현실이 됩니다. 프랑스에서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암살 음모가 우여곡절 끝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 사건 이후로 헨리 5세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먼저 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당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그의 내면을 휘감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단합니다. 영국군을 총집결시켜서 프랑스와 전쟁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였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정규군의 병력이 영국 병력의 약 5배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약 5배가 넘는 프랑스 정규군을 영국군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헨리 5세는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전쟁 포로로 사로잡은 사람들을 전부 다 교수형에 처해버립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말립니다. 지배국의 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 통치가 수월합니다, 왕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5세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였고,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그 이후에 인근 주변을 다 불태웁니다.
주변이 경악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전쟁에 불이 없는 것은 소시지를 겨자 없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폭군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적국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화를 사랑했던 그가 왜 이런 폭군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 겁을 내는 것, 이 두려움은 나중에 자라서 큰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그 당시 유대 종교 권력가들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권력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파생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의 실체와 근원을 밝혀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직면하고, 이 두려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오늘 우리 마음의 두려움을 치료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주님은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따라 살고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따라 살지 않는 성전을 향한 예고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계획이라도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성전 안에서 당신이 하시고자 했던 일을 속전속결로 해치우십니다.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성전 안에 장사치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매매하는 자들, 짐승을 파는 자들입니다. 유월절 예배에 쓰일 짐승을 파는 자들이 성전 안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성전 안에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 돈을 통용할 수 없게 되자, 그 성전 안에는 옛날 유대인의 화폐를 당시 로마 화폐로 바꾸는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을 주님이 둘러엎으셨습니다. 새장도 잔뜩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새장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있는 힘껏 성전에 있어야 하지 않을 것들을 하나하나 완전히 정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무서운 모습이고 예수님의 격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시선은 유대 종교 권력가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성전을 훼방하는 모습으로 봅니다. 난동꾼으로 보았습니다. 유월절 잔치를 완전히 망치는 예수님의 망령된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선도 있습니다. 두 번째 시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건 아닌데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과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성전에 사고파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성전에 돈 바꾸는 사람들, 짐승 파는 사람들이 있는 이 성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속 시원한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의 속마음을 한번 되새겨 봐야 됩니다. 그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더라면 왜 행동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이 성전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그들은 가만히 있고 행동하지 못하는, 고민하는 지성이 되었을까요? 아마 두 가지 부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득권 집단이 있었다면 그들도 역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이익을 나누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받아먹은 것이 있으니, 자기도 그들과 함께 한통속이니 감히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뒤가 구리니 앞에 나서서 소신껏 발언할 수 없는 사람들도 한 부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목소리 높이면 나에게도 피해가 가고, 나와 함께하는 가족이나 공동체 모두가 손해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성전은 이 악한 일을 감당하며 진행하면서 여기까지 흘러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시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셨을까요? 우리 주님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매 맞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제 곧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겁나고 무서운 것이 죽음인데,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주님,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 주님은 하나님 한 분의 명령을 듣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한 분이 계신데, 그 한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내가 보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거룩한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관계도 신경 쓰이고, 기득권도 신경 쓰이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신경 써야 합니다. 얼마나 복잡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생활이 단순해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정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중에는 위로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개혁을 이루어간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중에 한 분만 예로 든다면 일사각오를 가지고 살아갔던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순교자입니다. 그분은 일사각오의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한 번 죽는데 한 번 죽을 때 잘 죽어야 되겠다,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것도 죽는 것인데 중간에 죽을 것 같으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가치 있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분은 그렇게 마음먹고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상 앞에 절하는 일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제의 총과 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진 고문도 견뎌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한겨울 그 추운 독방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그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나중에 심판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서 너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죄짓다 왔느냐, 우상에게 절하다 왔느냐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 사는 인생 하나님 한 분 두려워하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언약의 백성,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난장판입니다. 성전의 상을 다 뒤집어엎고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이 다 먼지투성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