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5 -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 (벧전 5장)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오늘은 베드로전서 다섯 번째 시간으로 5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5장까지, 베드로후서는 3장까지 되어 있는데, 오늘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보통 책을 쓸 때도 그렇고 어떤 서신을 쓸 때도 그렇지만 마지막이 결론입니다. 베드로전서 마지막 결론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그것도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교회를 무척 사랑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고 부인했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나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배신감으로 따지자면 예수님이 느꼈을 그 배신감은 베드로가 더 컸을 것입니다. 수제자였고 3년 동안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인데 그 같은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맡겨주기 위해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신 같은 죄인에게 예수님이 이 교회를 맡겨주시고, 베드로의 원래 능력과 상관없이 교회가 막 성장했습니다. 한번 설교하니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고, 또 한번 설교하니 오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고, 날마다 떡을 떼고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고, 그런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부흥하면 겁이 납니다. 이게 어떻게 되려고 일어나는 것인가 싶습니다. 그런 교회를 베드로가 무척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확 닥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는 사건으로 그때부터 핍박이 닥치면서 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외에는 다 흩어집니다. 흩어졌는데 어디로 흩어졌느냐,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막 커졌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됐네' 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유무상통하고 떡을 떼며 즐거워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주신 비전은 권능을 받으면 흩어지고 나가라고 했는데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살짝 폭탄 작은 것을 하나 딱 떨어뜨리니까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것이 사마리아이고, 그리고 안디옥에 가서 개척했고,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서 땅끝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랬던 과정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무척 자기에게는 예수님의 분신 같은, 예수님의 유산 같은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전서 마지막 결론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대상으로 성도들은 이렇게 하고, 장로님들은 이렇게 하고, 젊은이들은 이렇게 하십시오 하는 권면을 마지막 결론으로 내리는 것입니다.

1. 장로에 대한 권면

1-1. 장로의 정의

먼저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에 보니까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언어를 읽을 때 오늘의 언어로 생각하시면 곤란하고 과거 그 당시 기록될 당시, 선포될 당시의 언어를 생각하고 읽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 2000년의 시차 때문에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그 베드로가 장로라고 표현했던 그 당시 장로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프레스비테루스(πρεσβύτερος)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적어두었느냐 하면, 그 당시 장로를 일컫는 말들이 그냥 연장자를 장로라고 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나이만 많으면 어떤 부락이나 부족 공동체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그냥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장로는 지도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나이만 많다고 장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당시 베드로 당시에 교회 장로는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말씀 사역, 또 하나는 교회 행정 즉 치리와 권징에 관련된 사역, 두 가지를 다 했습니다. 오늘날에 목회자와 장로의 차이는 두 가지 역할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 사역이고, 교회 장로님들은 치리와 권징과 행정의 역할로 이렇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부재한 교회 같으면 장로님들이 말씀도 전하기도 하고 성경 공부 인도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완전히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고 보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베드로가 장로들에게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와 교회 장로들을 동시에 대상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목사들이 '나하고 상관없네' 이렇게 읽으면 안 되고, 성도들도 '아, 이건 교회 지도자들을 통칭적으로 일컫는 말이구나, 목회자와 장로님들을' 그렇게 읽으셔야 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자기가 장로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말씀 전했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행정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치리도 하고 책망도 하고 교회 행정하고 권징하고 다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 두 가지를 베드로가 다 한 것입니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이 중간 권을 일단 한번 빼봅시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중간 것을 빼면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꿈꿉니다. 나타낼 영광이 무엇입니까? 장차 나타날 예수님의 재림, 저 천국의 영광, 이 영광에 참여할 자입니다. 교회 중직으로, 목회자로, 장로로 쓰임받고 훈련받고 성실하게 봉사하고 하는 그 이유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곧 중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입니다. 증인이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법정에서 자기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증인이 법정에서 가만히 한마디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 증인의 자리에 왜 있겠습니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증인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있다는 것은 증언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목회하고 있는 이 상황, 이런 초대교회의 이런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뻥끗했다가 잡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목회자들은, 장로와 목회자뿐만 아니고 교회 모든 성도들은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먼저 서두에 던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만 가져가겠다고요?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지 그것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습니까?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장로는 삶으로 살아내고 성도도 삶으로 살아내라, 그것이 이 5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1-2.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

삶을 살아내라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했습니다. 양 무리를 누구의 양 무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양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내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입니다. 내 양이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내버려 놔도 되고, 그냥 잡아먹어도 되고, 그냥 방임해도 되고, 잘 키워서 팔아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내 양이 아닙니다. 누구의 양입니까? 하나님의 양이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몹시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고요? '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이 '치라'라는 표현을 헬라어로 보면 포이마이노(ποιμαίνω)입니다. '목양하다'라는 뜻입니다. 목양이 무엇입니까? 목자로서 양 떼들을 이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목사 방을 목양실이라고 써놓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6절을 보면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여기 '치라'가 포이마이노입니다. '목양해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치라.' 여기도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양이 아니라 누구의 양, '내 양'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장로들, 즉 목회자와 오늘날의 목사들과 오늘날의 장로님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양 떼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목양하는 것입니다. 내 양이 아니라 신경 바짝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양을 잘못 인도하면 그러면 누구에게 책망 받습니까? 하나님께입니다. 정말로 잘 인도하면 누구에게 칭찬받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고 또 무거운 사명이기도 하고 무서운 사명이기도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3. 세 가지 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