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지난 시간까지 다룬 핵심적인 단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새 언약의 일꾼'이었습니다.
새 언약이 있으면 옛 언약이 있는 것인데, 옛 언약이라 하는 것은 율법을 중심으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보아서 알지만,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 하고 율법으로 아무리 구원받으려 애를 쓰고 수고하며 노력해 보아도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안 되는 것이로구나. 율법으로는."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각 사람의 심령에 주어지는 것이 성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은 성령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꾼입니다.
성령으로 함께 일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용어에 의하면 '질그릇이 품고 있는 보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인데, 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질그릇인 나는 질그릇으로서 살아갈 뿐, 나를 통해서 빛나시는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칭찬하고, 나를 보고 잘한다고 격려한다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 된 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오직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내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 죽음이라는 것은 단 한 번의 일회적인 죽음이 아니고, 네크로시스(νέκρωσις)라 해서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새 언약의 일꾼 된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잘 기억하고 계시면 공부를 잘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이 개념을 가지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느낌을 가지고, 그다음 단계인 '새로운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장막집과 영원한 집은 어떤 의미입니까?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양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뒤의 구절을 보면 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까지 보아도 별로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2절을 보니까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즉, 땅에 있는 장막집의 반대 개념이 덧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덧입는 것.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장막집은 육체입니다. 내 육체, 내 몸. 지난 시간 끝부분에서 "겉사람은 날로 쇠한다"라고 했습니다. 겉사람, 이 육체는 쇠하지만, 내 영혼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항상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품어 안고 사는 존재인데, 질그릇은 갈수록 장막집처럼 낡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 80년 살다 보면, 한 100년 살다 보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었던 장막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쓰러집니다. 다 사라지고 누더기가 되고 병들어서 우리는 이 장막집을 벗어나게 됩니다. 벗어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2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다고 했습니다. 즉,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용어로 보면 '신령한 육체'입니다. 신령한 몸.
조금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영향을 지금 고린도 사람들은 받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이 육체는 악한 것이다. 그래서 더럽고 악하고 추악한 육체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수 있느냐 하면서 육체를 굉장히 부정합니다. 그런데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 올라가는 게 아니고 신령한 몸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떤 상태로 부활할 것인가? 내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근육도 빵빵했던 20대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또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들, 몸에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는데 천국에서도 불편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육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령하다'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가 천국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령하다'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땅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한 자를 천국에서도 그 모습으로, 그 수고한 모습으로, 몸이 힘들고 아팠던 모습으로 부활하게 하신다면 그것을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하셨겠는가 하는 질문을 거꾸로 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하는 말은, 땅에 있는 장막집은 내 육체이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덧입는다는 것은 신령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일단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장막 사상은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그러면 이 장막이 무엇입니까? 텐트를 말합니까? 육체입니다. 육체. 장막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육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만 나오는 사고가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런 사고가 있습니다. 장막은 어떤 것입니까? 특징이 옮겨 다닐 수 있습니다. 텐트니까 여기 폈다가 저기 폈다가, 접었다가 폈다가, 이 작업이 굉장히 용이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보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말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자기 삶의 정체성을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장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텐트라는 생각을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고, 내 육체도 쓰다가 그냥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고는 이 육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인데, 그런데 천국에서 신령한 육체로, 부활체를 덧입는다, 이 사고를 그들은 항상 부활 사상에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만 과연 장막입니까? 내 육체만?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장막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라는 건물도 장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육체가 영원할 것처럼 육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고, 너무 많이 찍어 바르고, 너무 많이 고치고, 그렇게 살 이유가 과연 있습니까? 철마다 시마다 때마다 옷 사 입고 바꿔 입고. 자기 돈으로 하는 것 뭐라 할 수는 없으나, 우리 집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는 집도 사실 그냥 불편함 없이 살면 되는데, 그 장막에 그렇게 많이 투자를 하고, 그것 때문에 죽을둥살둥 수고하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애쓰고 힘써야 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건물. 과거 성막 시절이 있었고, 성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시절의 시작은 솔로몬 성전이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정말 거대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그가 하나님께 봉헌 예배를 드립니다.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이 "야, 너 정말 잘 지었구나, 멋지게 잘 지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중에 핵심을 한번 보려 하는데, 열왕기상 9장 6절과 7절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내 앞에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봉헌 예배 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헌식 때 이 성전을 멋지게 지어 가지고 요즘으로 말하면 헌당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왔습니다. 구름떼같이 모였는데, 하나님이 그중에 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하는 대표인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성전을 던져버리겠다"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건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렇게 백향목으로 짓고 상아로 짓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중요한 것은 이 성전의 쓰임새다. 본질이 중요한 것이지요.
성막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막 시절.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성막, 이 성막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들어오면, 성막에 바로 들어오면 뜰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지 않습니까.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있습니다. 다 태웠습니다. 그리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지요.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습니까. 자기 죄 다 사하고 그리고 갑니다. 그러면 이 성소의 기능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하고 은혜받는 것입니다. 예배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온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표로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께 속죄의 피로써 죄를 올려드리고 죄 사함 받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의 기능입니다. 성막 시절이나 성전 시절이나 지금 교회 시절이나 똑같습니다. 공간이라는 공간의 기능은. 그런데 이 공간을 뭘 그렇게 화려하게 지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수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그러면 그냥 끝나는 것이지 더 이상은 화려할 이유도 없고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막이니까. 그냥 그대로 장막이거든요. 있다가 없어지는 장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