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갈라디아서 특강 5장과 6장을 살피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함께 공부했고,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사실 서신서를 공부하는 것은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경도 알아야 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도 함께 파악해야 하며, 초대교회 당시에 주고받던 용어의 의미들도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고 불릴 만큼 복음을 변증하는 데 굉장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분노하며 갈라디아서를 시작했는데, 복음을 물타기하는 자들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경고를 했습니다. 원래 구원이라고 하는 것, 바울이 전한 구원의 은혜는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으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주의자들이 거기에 슬쩍 하나를 끼워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단순히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할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인데, 이것이 구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구원을 위한 할례라면 절대 안 된다고 바울이 목숨 걸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5장과 6장 이야기는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결론과 동시에 바울이 한 번 더 방점을 찍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결단을 촉구합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제는 결단하자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우리를 굉장히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면 '무엇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눌림으로부터의 자유,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이 자유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려 할 때 그들의 장자가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의 사자가 그 집 앞을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있었던 것, 그것밖에 그날 밤에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사자를 달래기 위해서 그 집 앞에 커다란 제물의 향을 피운 적도 없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한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 했던 것 딱 한 가지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그냥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하지 않을 자유, 그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한 번 더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고 했습니다. 굳건하게 서라는 말은 어디에 서라는 말입니까? 이 진리 위에 서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이 안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돈도 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되고, 할례도 받아야 되고 등등의 조항들을 추가하면서 사람들을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다시는'이라는 말을 보면 과거에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 유대주의자들, 유대 율법주의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참자유를 얻었으니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장의 의미로 살펴보면 퇴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아닙니까?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아래서 우리는 구원받았으니까, 그런데 할례를 받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가 구원의 수단이 되면 예수님 말고 할례를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그런 논리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하느냐, 너희 열심을 통해서 구원으로 나가려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에게 그리스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도 찾고 왜 행위도 하려고 하느냐, 오직 너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필요할 뿐이지 다른 일체의 것은 구원을 위해서는 필요 없다, 이것을 한 번 더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을 적어뒀는데, 퇴행이라는 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이 말씀 때문에 민수기 14장을 적어뒀습니다. 이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멈추시고 각 지파별로 정탐꾼 한 명씩을 뽑습니다. 12명이 나왔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입니다. 그 12명을 가나안 땅에 40일 동안 정탐하라고 보냅니다.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들이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보고합니다. 그 보고의 내용입니다. 1절을 보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니까, 우리는 절대로 못 들어간다, 그 땅은 강하고 힘이 있다, 우리는 메뚜기 같다, 그런 보고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응이 지금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절이 결정적인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것이 퇴행입니다. 믿음의 퇴행입니다. 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들어가기가 두려우니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과거 종의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고 하는 퇴행입니다. 이런 기이한 퇴행의 행동을 보이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믿음의 퇴행을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나를 멸시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지 않는다, 불신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한들 그리스도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한다고 한들 나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내 행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행하신 거대한 역사의 대서사시를 한번 보셔야 합니다. 이집트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행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에 이집트의 최정예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수장당했습니다. 그토록 비싼 값어치를 치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까,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크고 작은 부분에서 우리에게도 자주 있습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믿음의 성장이 좀 일어나는 것 같다가 이제 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 같다가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이루기를 원하는 분이시지, 다시 원점으로, 다시 제자리로 그렇게 돌아가기를 원하는 분이 결단코 아닙니다. 성장을 원하는 분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집에 살림이 흥하고 부하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사업이 잘 되고, 이것이 믿음의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 성공입니다. 갈수록 믿음의 성장은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뒤에 가면 또 나오는데,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정의했지 않습니까? 바울이 정의하는 믿음의 정의는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능하니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내가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데, 믿음의 성장은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믿음의 업적을 자꾸 강조합니다. 그것이 퇴행입니다. 이 퇴행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생각보다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할례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을 위한 할례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할례 받는 자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그리스도를 버리고 행위의 길로 이미 나섰으니까, 너 그 길로 나섰느냐, 그러면 너의 행위 100%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다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행위구원론자들이 빠지는 오류들이 있는데, 이분들은 선택적 행위를 합니다. 부분적 선택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합니다. 할례 받고 싶어서 할례 받고, 내가 봉사하고 싶어서 봉사하고, 하기 싫은 것은 또 안 합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행위구원론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려면 기왕 그 길로 나섰으면, 그리스도를 버리고 행위의 길로 나섰으면 다 해야 합니다. 다 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