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막 11:12-14)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덟 아들 중에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에 대해서 다섯째 아들 방원이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조선을 창건하는 데 혁혁한 전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급기야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막내와 이복동생들을 차례로 제거해버립니다. 그리고 허수아비 왕 정종을 조선의 2대 왕으로 세웠습니다. 정종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터라 2년 만에 왕위를 동생 방원에게 양위합니다. 그래서 방원이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됩니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였습니다.

정실 부인이 낳은 첫 번째 아들이 아니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들은 반드시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실 부인에게서 네 명의 아들이 나고 그중 첫째 아들 양녕을 열 살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습니다. 양녕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예에 출중했고 남자다운 기백이 있었습니다. 사냥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목구비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세자로 책봉한 이후에 보니 행실이 문제였습니다. 궁전 벽에다가 개구멍을 만들어 두고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관리의 첩을 데리고 와 통간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색을 심하게 밝혔습니다. 그 때문에 태종의 시름이 깊어져 갑니다.

어찌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세자를 폐위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세자를 누구로 세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이 함께 모여서 의논합니다. 누구를 세우면 좋겠느냐 하니 신하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말하기를 셋째 아들 충녕이 적합한 사람입니다. 이유는 독서를 넓게 하고 깊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와 세상의 이치에 두루두루 통달하고 밝은 사람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속이 깊고 강단이 있고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이분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종도 신하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훗날 충녕은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양녕과 충녕의 차이는 열매의 차이였습니다.

양녕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었고 그 속이 텅 빈 열매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충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열매가 많았고 나누어줄 것이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조선의 4대 왕이 되고 조선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고 모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문화를 주도한 융성한 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혹시 나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을 깊이 살피고 교회를 살피고 우리 공동체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굶주림 속의 원칙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습니다. 제일 먼저 성전에 갔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가서 그들은 실망하고 돌아옵니다. 성전이 성전답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베다니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유월절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가난한 마을에 가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하십니다. 아침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십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동네에서 아침 식사를 거르고 오셨습니다. 식사를 못 하셨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예수님이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아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데 왜 굶고 다니실까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이 아침을 든든히 드시고 오셔야 되는데 왜 굶으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한 가지 원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메시아의 신적 권능을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사탄이 나와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이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서 드시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사탄의 유혹에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 하루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팠습니다.

밀 이삭을 뜯어다가 비벼서 입에 털어 넣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참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아의 신적 권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사실 이 예수님의 원칙을 지켜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이 공동체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자신에게 부여받은 메시아의 신적 권능을 사용하겠다고 결단하시고 그대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1-1. 공과 사의 구분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공동체와 사회를 보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적인 위치와 공적인 능력과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자기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합니다. 특히 가장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 자녀 문제입니다. 자녀 문제에서 공적인 모든 기능이 자녀에게 수렴되어 다 무너져 내립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일반 국민들은 허탈감과 상실감을 가집니다. 누가 누구를 존중하고 누가 누구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원칙과 질서를 철저하게 지켜나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이에서는 아마 볼멘소리도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 밥 먹고 가며 일합시다. 배가 몹시 고픕니다. 예수님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우리가 식사를 대접받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밥을 먹고 일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 여기 이것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간청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단호하신 이유는 제자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40일이 지나고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이 교회를 맡아서 이끌어 가야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이 지도자가 되어야 됩니다. 지도자가 되어야 될 제자들이 교회의 공적인 것과 개인의 사적인 것을 혼동하고 헷갈리기 시작하면 교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 시절의 예루살렘 성전이 공적인 것은 다 무너지고 사사로운 배를 불리는 백성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만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보고 오신 것은 돈 바꾸는 자들의 좌판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둘기 파는 자들을 위해서 세장을 짓는 것을 보셨습니다. 짐승을 파는 자들을 위해서 짐승 우리를 짓는 것을 보고 오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전의 공적 기능은 기도하는 곳이고 말씀 듣고 예배드리는 곳인데 기도할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뒷돈을 받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서 좌판 만드는 일을 눈감아 주고 있습니다. 세장과 짐승의 우리를 만드는 일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교회의 공적인 기능, 하나님께서 원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이 완전히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1-2. 제자들의 배움

우리 예수님은 적어도 초대교회 공동체, 제자들이 세워가는 교회 공동체는 이런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통해서 그 교훈을 마음 깊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 나갈 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구제 문제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있었고 히브리파 유대인 과부들이 있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더 구제를 많이 하느냐 하는 문제가 교회의 논쟁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사도들은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손떼기로 했습니다. 이것을 전담할 수 있는 안수집사 일곱 분을 세웠습니다. 존경받고 실력 있는 사람을 세워서 그 일을 전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보는 일에 전력하셨습니다. 이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를 전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고 자신들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예수님께 배웠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메시아의 신적 권능을 개인의 사사로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교회가 나아갈 바를 배웁니다. 21세기는 이 사회가 급속도로 바뀌고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사회는 이렇게 급하게 변화해서 가는데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여전히 세습이 논쟁거립니다. 세습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해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논쟁 자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이게 어떻게 논쟁거리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개인의 대물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어떻게 자신의 가업 물려주듯이 대물림해 줄 수 있습니까? 이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사고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