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그 도입부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흥남부두 철수 장면이 도입부인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모티브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1950년 12월에 약 일주일 정도 진행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통해서 약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피난선을 타고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마지막 배가 빅토리호였는데, 그 배는 원래 화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물을 싣지 않고 사람을 실었습니다. 무려 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이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 배가 출항해서 거제도까지 오는 동안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안전하게 철수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장진호 전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있는 호수 이름입니다. 1950년 12월 개마고원 장진호는 무척 추웠습니다. 영하 27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 추위도 추위지만 갑자기 참전한 중공군의 위세에 밀려서 UN군과 국군은 저지선을 목숨으로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저지선을 지켜내었기에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UN군 약 만 7천여 명이 전사합니다. 그들의 전사와 또 그들의 업적을 기념하고 기리면서 지금도 미국에 가면 워싱턴 전쟁기념공원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는 자유를 향한 절박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명예요, 소중한 가치입니다. 자유를 잃어본 자만이 절박한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절박하게 자유를 향한 갈망과 몸부림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보면 절박함과 간절함이 자신의 삶을 바꾼 한 명의 믿음의 선배를 만납니다. 그분은 바로 맹인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이분의 삶을 보면서 과연 오늘 나는 이분만큼 절박한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간절함과 절박함이 혹시 상실되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간절함을 다시 끄집어내고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만나는 첫 번째 성이 여리고였고, 여리고를 지나 약 36킬로미터 정도 서쪽으로 가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여리고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가는 사람들로 그 도시는 항상 시끌벅적했습니다.
오늘 말씀 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셔야 될 것이 "이르렀더니 나가실 때에"라는 구절입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르렀더니 나가실 때에." 이 말은 우리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머무를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저기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우리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도시를 거쳐 가는 여리고에는 단 한 시간도 지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길을 빨리 지나가서 얼른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주님의 일행은 여리고에 도착하자마자 지나간 것입니다. 이르렀더니 이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짧은 찰나에, 그 짧은 순간에 주님을 불렀던 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소경 바디매오였습니다. 46절 하반절부터 47절을 읽겠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분은 맹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짧은 시간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것을 어떻게 알고 주님을 목청껏 불렀을까요? 그것은 그분의 마음속에 항상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맹인이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주님을 따라서 이 도시 저 도시로 주님을 따라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젠가 한 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려면 우리 동네를 지나가셔야 되는데, 그때 내가 주님을 목청껏 불러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되겠다. 이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항상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동네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청껏 외쳤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은 기회를 그는 꽉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회가 한두 번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를 붙잡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치 물처럼 기회를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세월을 흘려보냅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기 때문에 내일도 우리에게 당연히 보장된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1년 뒤, 10년 뒤가 과연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0년 뒤를 보장하셨는가? 우리에게 보장된 시간의 미래가 어디까지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시간을 약속하시고 시간의 미래를 보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습관과 관성에 의해서 내일도 여전히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착각과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결코 우리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도 우리에게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그때 이것을 붙잡아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 주셨을 때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열심히 말씀 읽고 훈련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달란트 주셨을 때 그 주신 건강과 달란트 가지고 주님 사역과 일에 열심히 다 노력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정성껏 예배드려야 됩니다. 마음 다해 주님 섬기며 예배드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간이 과연 똑같이 우리에게 그다음도 그다음도 주어질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시간을 그냥 헛되이 보내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노아 시대를 보시면 노아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다 방주로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 아닙니까?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나무를 베고 수선스럽게 방주를 지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방주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는 낙이 영원할 줄로 믿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홍수 심판을 예정하시고 방주를 준비해 두셨는데,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린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의 사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고 롯의 사위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기회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생명을 헛되이 보내버린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는데, 그 기회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절박한 자가 기회를 잡습니다. 그 기회를 잡으면 그 기회가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여기 여리고성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눈 뜨고 있었지만 눈뜬장님들이었습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여기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영적인 눈이 열려서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붙잡았던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과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분이 예수님께 어떻게 외쳤을까요? 47절을 한 번 더 보시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 가장 짧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기도에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밑도 끝도 없습니다. 기도가 투박합니다. 단순합니다. 거칩니다. 미사여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이 기도를 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기도는 기도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부합한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왜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도는 내 부족과 연약을 저 높고 높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는 과정입니다. 내가 미련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여, 저는 이것이 부족합니다. 저는 이것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로 나의 부족을 가득 채워주십시오. 이것이 기도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분의 기도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