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31)

1. 좋은 질문의 힘

지금 세계적인 기업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다소 특별하고 엉뚱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름이 '룬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니스장만 한 크기의 거대한 풍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풍선 안에 헬륨가스를 주입합니다. 그리고 그 풍선 밑에다가 무선 통신 장비를 잔뜩 탑재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약 20km 높이 정도로 띄웁니다. 무선 통신 장비를 운영하는 에너지는 태양열을 사용합니다. 지상에 있는 통신 회사와 연결해서 반경 수만 km 이내의 사람들이 무선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하고 파격적인 프로젝트를 구글이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함께 모여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가 전 세계 어디서나 인터넷을 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졌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맞장구를 칩니다. "산속이나 아프리카 사막이나 우주에서도 마음대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그런데 사막에 광케이블을 매설하고 기지국을 세우는 데는 돈이 엄청나게 드는데 어떻게 할까?" 또 곁에 있던 사람이 "풍선을 만들어서 무선 인터넷 장비를 띄우면 되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럼 우리가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상용화가 거의 가까이 왔고 캐나다에 있는 한 통신 업체가 구글과 독점 협약을 맺었습니다. 계속해서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이 내용을 일본인 뇌 과학자인 모기 겐이치로라는 분이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소개하는 내용은 구글 엔지니어들의 훌륭한 질문의 태도였습니다. 좋은 질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로 하여금 가게끔 하고, 인류에 대한 미래도 새롭게 개척하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고 또 질문을 받고 삽니까?

하지만 이 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질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질문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질문 하나로 굉장히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고, 그 질문 하나로 상대방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너 왜 이제야 오니?"라고 질문하는 것은 지금 불쾌하니까 한번 싸우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하지 않고 "많이 늦었구나. 밥은 먹고 다니냐?" 이렇게 질문하면 한결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집니다. 또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너 도대체 왜 그래?"라고 질문하면 싸우자는 시비 거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 말고 "너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픈 데 있니?"라고 질문하면 그 질문은 훨씬 더 부드러운 질문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의 기술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분위기뿐만 아니라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래까지도 개척하는 힘이 질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까지도 책임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질문,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그 앞에서 직접적으로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방향을 바꾸어 돌려서 그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었던 약점을 꺼내고 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덮어 가십니다. 오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주님께 드려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2. 부자 청년의 질문

그분이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드렸을까요? 10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굉장히 좋은 태도입니다. 격식 있고 예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내용을 논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는 살펴야 됩니다. 그분은 공관복음에 다 등장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 사람입니다. 공관복음서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분은 젊은 사람입니다. 청년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자입니다. 돈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라고 함은 유대인의 대표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물질도 가지고 있고, 재력도 있고, 게다가 젊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더 있어서 그분은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관심이 많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벽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가 딸이 있다면 사위 삼고 싶을 만큼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2-1. 행위로 얻는 구원?

하지만 그분이 던진 질문을, 우리가 이 질문의 적합성과 유연성을 살펴봐야 됩니다.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과연 이 질문이 옳은 질문일까요? 영생을 자신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싶은데 제가 어떤 일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즉 구원을 행위 구원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받으시고 그분을 따끔하게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너 다시 말해 봐. 이 질문 틀린 질문이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번에 질문을 끌고 가면서 그분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하고 깊이 있게 살피도록 하십니다. 율법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느냐?"라고 되물어 오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 계명을 예수님께서 물어보셨는데 이 계명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 돌판 두 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과 백성 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판에 대한 내용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선행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선행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 돌판을 언급하시면서 "너는 두 번째 돌판, 너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며 살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2-2. 율법의 한계

이 질문에 대해서 그분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나이다" 자신감이 묻어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뿌듯함이 묻어 나지 않습니까? 동시에 그분의 내면 속에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고생하고 애쓰고 마음의 갈등이 있었던 그분의 수고로움도 보이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켜 가기 위해서 그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억누르고 고생하며 고통을 받으며 율법에 매여 살아왔던 그분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청년 시절까지 오기까지 그분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뇌와 고통들이 한꺼번에 다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야 됩니다. 다 지켰는데, 선행을 위한 율법은 다 지켰는데, 그런데 왜 다시 주님께 나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왜 하는 것입니까? 다 지켰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굉장한 약점을 발견합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최선을 다해서 지켰는데 나보다 더 고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보니까 선한 행위의 대단한 고수입니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 축에도 끼지 않던 어린이까지 가슴에 안고 축복 기도 안수 기도까지 해 주셨습니다. 유대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지역도 자유롭게 다니십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들을 예수께서 찾아다니면서 품어 안으셨습니다. "나는 선한 행위를 하고 이렇게만 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선한 분이 계시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존재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