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실존의 단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습니까? 강인한 인내력과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횡단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살고 있고, 먹고살기 위해서 인생의 수많은 짐들을 감내하고 견디며 지금도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자 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들을 다 던져 버리고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내가 짐을 지고 걸어가면 누군가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기대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 자율적 이성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사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로 사는 실존은 공동체를 해칠 만한 위험이 따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로 어린아이와 같은 단계를 말합니다. 세상 천진하고 평화스럽고 걱정 없고 염려 없는 어린아이의 단계가 실존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니체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이 실존의 세 단계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낙타의 단계에서 사자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생각의 전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수동적으로 살다가 능동적으로 살겠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지 않고 스스로 사자처럼 자유분방하게 살겠다는 결단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자로 사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어린아이의 단계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령의 신적 도움이 없으면 갑자기 우리 마음속에 내적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거대한 짐을 지고 살아가다가 갑자기 짐이 벗겨지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서 이 세상의 수많은 짐들이 다 벗겨지고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사자처럼 먹고살기 위해서 주변을 어지럽히고 힘들게 했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신적 평화가 우리 인생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찾아온 사람들은 이전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왔습니다. 몸이 아픈 아이는 예수님이 만져 주시고 안수하심으로 몸이 회복되기를, 지혜가 좀 부족한 아이는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면 지혜가 풍성해지기를, 인생의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면서 인생의 꿈이 풍성해지기를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내가 가서 머리 들이밀고 기도받기보다는 우리 집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예수님께 기도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심정은 다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좀 이전과 다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13절 후반을 보시면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꾸짖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금했다, 가로막았다, 벽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는 뜻입니다. 금하고 벽을 세우고 안 됩니다, 못 갑니다 하고 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우리는 한두 가지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이 어린아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회적 관념입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 여자나 어린아이는 숫자로 세지도 않았습니다. 성인 남자들만 셌습니다. 즉 어린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제자들의 가슴 속에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며 아이들을 막은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많이 다니셨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셨고, 남쪽에서 강을 건너 요단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덫을 친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논쟁하시면서 많이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피곤하시니까 지금은 안 된다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제자들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 다음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분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의 모습이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직무가 무엇입니까? 제자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제자들은 나가서 전도해 오지는 못할망정, 나가서 데려오지는 못할망정, 자기 발로 걸어온 사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넘어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이 땅으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남자에게서 여자로, 의인에게서 죄인으로, 가진 자에서 못 가진 자로, 그렇게 예수님은 오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선을 그어 놓고 벽을 높이 쌓아 두고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금하고 금지하고 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럽다고 비난하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새 가족들을 면담해 보면 이런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연세가 아주 연로하신데 어릴 때는 신앙생활을 하고 젊을 때는 교회에 나갔는데, 한 20년 30년 신앙을 쉬다가 다시 교회에 나왔습니다. 20년 30년 방황하시다가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여쭤봅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쉬셨습니까? 그분들이 이런 말씀을 간혹 하십니다. 젊었을 때 교회에서 못 볼 것도 많이 봐서 마음에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쉬었습니다. 부모님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받고 돈도 떼이고 그래서 교회라고는 꼴도 보기 싫어서 수십 년 동안 쉬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나왔는데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을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회자가 반듯하게 목회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목회자로 인해서 시험 들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목회자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혹시 도덕적인 문제를 저지른다면 교회 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그런 목회자들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교회 중직자라고 함은 모름지기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일까요? 교회 중직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 놓는 역할을 하셔야 됩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나의 정체성은 나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나로 인해서 복음이 회향할 수도 있고 나로 인해서 복음의 걸림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생각을 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하면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들인데 삶의 현장에서,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가로막는 장벽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어때야 할까요?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내가 이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교회는 낮아져야 됩니다. 교회가 손에 잡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질서와 법을 준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 법이 있고 사회 질서가 있는데 교회가 높은 사람을 이용해서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산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일수록 사회 질서와 법을 준수하고 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지켜 주는 교회가 여러 사람들에게 존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혹시 우리가 잘못하면 혹시 내가 하나님과 세상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항상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장벽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 주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을 우리 주님이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부디 우리가 내가 지금 복음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회향꾼이 되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회향꾼이 아니라 복음의 디딤돌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보고 화가 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런 자는 당연히 어린아이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어린아이들에게 이토록 좋은 평가, 높은 평가를 하셨을까요?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받든다는 단어는 데코마이(δέχομαι)라는 헬라어를 쓰고 있습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영어 성경에 보면 리시브(receiv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높이 평가하신 이유는 수용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수용성이 높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수용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린아이는 어디에 수용성이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