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범한 여성 디자이너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푸념 섞인 고군분투기다.

결혼과 육아로 인해 자신의 시간을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며 쓴다.

<aside> 💡 정체성의 용해는 Rebecca Solnit의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에 쓰인 ‘This dissolution of identity is familiar to travelers in foreign places and remote fastnesses...’라는 구절에서 ‘dissolution of identity’라는 표현을 빌려왔다. 이 글에서는 ‘디자이너’와 ‘엄마’로 이원화된 글쓴이의 역할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균일하게 섞이는 과정을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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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로서 시작

디자이너로서의 첫 시작은 6년 정도 근무했던 디자인 에이전시이다. 햇수로는 그렇지만 거의 잠들지 않고 온종일 일했던 적이 대부분이니 실제 근무량은 그 곱절일 것이다.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시각 매체 디자인을 수행했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한 디자이너들의 국내 유입과 함께 더치 디자인Dutch Design이 그래픽 디자인계를 주도하고 있던 때. 그 한 켠에 인문학과 사회학을 매개로 디자인을 실천적 행위로 이끌어내고자 한 흐름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첫 직장은 그 흐름 가운데서 활동하던 곳이다. 그곳에서 작업한 사회운동으로서 기능하는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텍스트-이미지-디자인-공간을 맥락화하는 앞선 이들의 디자인력을 경외했다. 당시에 규모 있는 디자인 에이전시여서 조직 내 분업이 명확한 곳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디자이너가 담당한 각 프로젝트의 기획에서부터 현장 감리에 이르는 대부분의 과정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업무 강도가 높았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첫 직장이고, 직장 내 선배들은 그렇게 해왔으며 직장 바깥에 소통하는 디자이너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겐 비교 대상이 부재했다. 그런 업무환경이 기본값이었다. 디자이너로서는 프로젝트마다 진폭이 큰 매체를 넘나들며 모든 과정을 직접 관리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렇게 디자이너 개인으로는 일의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오로지 오늘만을 사는 삶이었다. 꽃가루를 나르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오가다 어느새 자신의 날개가 바스러지는 순간에도 쉼 없이 날갯짓하는 꿀벌의 비행과도 같은 시간들. 디자이너로서의 성장이 나의 목표이자 그것이 나를 행복으로 견인하리라 믿었던 그 시간의 끝은 캄캄했다. 모든 에너지를 다해 프로젝트를 이끌어도 결국 대표의 이름으로 수렴되었고, 디자이너로서 온전한 내 이름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표방하는 사회운동으로서의 디자인이라는 것의 본질과는 다르게 실제 내부 디자이너들의 노동 환경은 열악했다. 나 또한 그 가운데 힘겨워했으나 한편으로는 방조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이너로서의 지속적인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마흔 살이 넘어도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멀리 가지 못했다. 서른 살 즈음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연달아 경험하면서 결국 디자이너로서의 시간은 멈춘다.

이름 없는 디자이너의 부재

그간 내 경험에 의하면 상대는—특히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도—대개 요구하는 바가 명확했고, 그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정확히 대처해주면 웬만해서는 상황이 매끄럽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육아는 달랐다. 말 못 하는 아이는 내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요구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을 때,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어젖혔다. 업무에서는 성실함과 일 처리의 탁월함을 자부해왔는데 육아는 그 모든 내 능력치를 끌어모아도 좀처럼 통하지 않았다. 아이를 재우는 것, 먹이는 것, 심지어 배변 훈련을 하는 것도 매사 쉬운 것 하나 없었다. 밤이면 아이 울음소리에 잠든 남편이 깰까 봐 서늘한 거실에 나와 밤중 수유를 하다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날이 부지기수였다. 밤중 수유를 하다 마주친 건너편 TV에 비친 내 모습은 늘 낯설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나’라고 생각해온 모든 외형과 거리가 멀었다. 수유와 함께 밤마다 마주하는 심연深淵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내 정체성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이름 없는 여성 디자이너의 부재는 늘 있었지만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나 또한 이렇게 업계에서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소실점 끝에 다다라 결국에는 사라져버릴 것 같은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중해 어딘가에 있는 작은 해변 사진을 보았다. 흔한 여행 사진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삶에 대한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채, 여전히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aside> 💡 심연: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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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육아에 전념한 지 2년이 넘어선 때,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품어온 사진 속 해변을 찾아 떠났다. 이 여정의 시작은 내게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의 시작에 첫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절벽 끝으로 밀어붙여 보고 싶은 일종의 모험심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지구 반대편으로 13시간 비행 후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파리에서 밤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로, 그리고 차를 운전해 카시스Cassis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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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그곳은 수많은 칼랑크 중 절벽 사이에 숨어있는 ‘칼랑크 덩 보Calanque d'En- V au’라는 작은 해변이다. 차로 진입할 수 없고, 오로지 거친 석회암과 돌로 가득한 길을 걷고 숲을 지나 가파른 절벽을 내려가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좁고 높은 절벽 사이에 위치한 곳이라 태양이 정 가운데에 위치했을 때, 터키석 빛깔의 바다를 보여준다고 하니 지체 말고 끊임없이 걸어야 했다. 아이는 신체 발달상 아직 걸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때였고, 무엇보다 가득한 호기심에 가는 길에 핀 꽃이며 나비, 도마뱀에 시선을 빼앗기느라 점점 시간이 늘어졌다. 더구나 가는 내내 그 흔한 이정표도 없었다.

미지의 공간을 걸으며 앞에 펼쳐질 길에 대해 온갖 추측을 했다. 육아를 하며 내다본 내 삶도 그랬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을 온갖 상상으로 채워 넣으며 늘 알 수 없다는 것에 불안해했다. 육아 내내 막막했던 기분이 이 길 위에서도 펼쳐졌다. 황량한 돌길에서는 도대체 언제 바다가 보이려나 싶은 마음으로 걸었다. 그 길 끝엔 바다가 아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언덕이 나왔다. 제대로 난 길로 가고 있는지,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