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생으로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조지프 슘페터 교수가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남겼습니다. 그분이 말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한 혁신적인 기업가가 자신의 기업의 조직과 문화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런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창조를 위한 파괴입니다. 새로운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그 물건을 유통시킬 유통 구조도 파괴합니다. 기존의 조직과 기존의 질서로는 한 단계 더 도약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한 단계 더 도약해 나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경제는 발전하고 세상은 변화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왔던 경제개발과 발전은 이런 창조적 파괴의 힘 입은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한 일간지에서 한국경제 100년의 모멘텀 이야기를 열 가지 사건으로 적어 놓은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도 창조적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극적인 사건 중에 제1번으로 꼽힌 것이 1983년에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이었습니다. 1983년 삼성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수장이 난데없이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당시 반도체는 초고밀도 집적회로를 통해서 만들어 내는 것인데, 가전제품을 겨우 만드는 회사가 언감생심 그걸 꿈꿀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비난하고 비웃기 시작합니다. 인텔 같은 회사는 이병철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성은 세계 반도체를 선도하는 기업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일에는 기업의 절반 이상이라도 바꾸고 혁신하고 이별하고 털어 내려고 하는 각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열 가지 사건 중에 제2위로 꼽히는 것이 1993년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습니다. 출장 중에 이건희 회장이 한 충격적인 영상을 봅니다. 자신의 회사의 세탁기 제조 라인에서 있었던 일인데, 제조 라인의 작업자가 뚜껑이 불량인 세탁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깎아서 맞추어서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임직원 200명을 소집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적 경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질적 경영, 품질경영을 하겠다. 그래서 그때 중요한 명언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내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꾼다. 파괴하지 않으면 창조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오늘, 그 기업은 여전히 일류기업으로 살아남고 또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기업은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파괴합니다. 기업은 살아남고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서 과거와의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우리는 과거와의 아름다운 단절과 때로는 안타까운 단절까지 감수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파괴하지 않으면, 털어내지 않으면, 우리가 옷 벗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의 편에 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대림절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가 지금 묶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낡은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 자신을 함께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질문할 때는 항상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질문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거기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혼해도 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뜬금없이 이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요.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덫을 쳐 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있는 그 자리는 요단 동쪽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어떤 인물입니까? 아내를 버린 인물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동생이 결혼했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서 결혼했습니다. 헤로디아를 자신의 처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왕이었으니까, 두려웠으니까 모두 다 침묵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세례 요한은 잘못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왕이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당장 사죄하십시오. 다시 되돌리십시오. 그리고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 요한이 잡혀갑니다. 참수당했습니다. 이 일을 예수님도 알고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답을 세례 요한처럼 하면 똑같이 고발해서 세례 요한의 그 길을 걷게 하려고 무서운 덫을 쳐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예스 노로 대답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질문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을 명하더냐"(막 10:3)
모세를 언급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출애굽의 영웅입니다. 율법의 창시자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말했는지야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 박사들이니까요. 모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