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본문: 창세기 13:14-18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자연의 운행을 관찰하며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미시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기구도 기술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연의 운행 방향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했습니다. 자연 철학자 중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인물은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에 들어가 있으면 그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오기 때문에, 같은 강물에 서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많은 사람에게 큰 파급 효과를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듯합니다. 사람도, 건강도, 우정도, 사랑도 영원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제까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안면을 바꾸기도 하고, 40년, 50년 친하게 지낸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떠나가는 일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건강도 영원하지 못하고 물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르침을 따라가면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인데,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버리면 진리가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아브람 역시 모든 것이 변하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자신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방향을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이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낙심한 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람은 롯의 영적 상태와 신앙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싫어서, 분쟁하기 싫어서 롯을 놓아 버렸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듣기에는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롯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미 물질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롯은 아브라함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소돔 땅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아브람에게 롯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아브람의 동생 하란이 낳은 아들로 아브람의 조카였지만, 조카 이상이었습니다. 아들보다 더 끔찍이 아꼈습니다. 아브람과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훌륭한 대안이었습니다. 롯을 아들로 양자 삼아 입적시키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신뢰했던 롯이 그만 자기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가 오는 것처럼 침침해집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낙심천만에 빠져 있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이 상심에 빠져 있는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눈을 들라,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였습니다. "눈을 들라"는 말씀을 보면 지금 그의 상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어떤 일도 귀찮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의 낙이 없다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아들보다 더 끔찍히 아끼고, 아버지 죽고 나서 거두어 주었던 조카가 나를 떠나다니. 고개를 숙이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떠난 롯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 마음의 지향점이요,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삶이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은 살아 있습니다. 먼 미래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괜찮아도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눈빛이 흔들립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현재가, 그리고 미래가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은 세 가지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첫 번째가 물질입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따라 살지 않습니까? 돈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습니다. 열심히 돈을 봅니다. 돈을 따라서 살아가고 물질을 따라 살아갑니다. 롯이 그랬지 않습니까? 애굽에 내려갔다가 비옥한 땅을 보았습니다. 농사 잘 되고 목축 잘 되는 땅을 보았습니다. 나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저런 땅에 가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소돔 땅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물질을 따라간 전형적인 사람이 롯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명예욕에 목마른 사람은 나를 출세시켜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났던 수가 성 여인은 사랑에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날 때 그때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진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따라, 사랑에 목이 말라서 시선이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따라 삽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과거의 영광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3)

출애굽 여정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 구워 먹고 있었을 때, 떡을 배부르게 먹고 있었을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실이 무척 고단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노예로 살던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배불리 먹고 있었을 때, 그때를 그리워하는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질에 목을 매고, 사람을 따라다니고, 과거에 내가 잘 나갔을 때 그때 참 좋았는데 하며 미래 지향적이지 않고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