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다 (막 10:1)

우리 조선시대 오백 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는 누구였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결론으로 가면 결국 한 사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바로 장영실입니다. 장영실은 워낙 유명한 발명가이고 워낙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혼천의를 만들었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만들었으며, 물의 높낮이를 알 수 있는 수표 또한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발명이 특별히 대단한 이유는 농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별자리를 관측해서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시간을 통해서 정확한 농사짓는 때를 특정하고, 청계천과 한강의 물 높이를 재어서 홍수를 미리 예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놀라운 발명품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그분의 아버지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관기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 당시 법대로 어머니가 관기였기 때문에 그도 태어나면서 관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동래현에 관노였습니다. 그런데 워낙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출중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만들고 잘 고치고,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깨끗해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왕실에서 궁중 기술자로 키웠습니다. 그에게 관직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궁중 기술자로 왕실의 필요를 따라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어린 세종은 어릴 때부터 장영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아마 마음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나중에 왕이 되면 이 사람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서 잘 활용해야 되겠다.' 실제로 그가 왕이 되자 그에게 벼슬을 하사합니다. 정오품 상호군 자리를 내려서 면천을 시켜 주었습니다. 신하들의 반대가 극렬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극렬한 반대를 뚫고 그를 면천시켜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 년 동안 장영실은 종횡무진 활약했습니다. 그 당시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과학 기술에 있어서는 뒤쳐지지 않을 만큼 위대한 발명가이고 과학 대국을 이루는 데 초석을 놓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이 인복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 시절에 유독 대단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학사들, 그리고 사군육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 남쪽에서 왜구를 토벌한 이종무 장군, 과학기술에는 장영실, 그리고 정치에는 황희와 맹사성 같은 재상들, 이분들이 한 시대에 풍미했기 때문에 아마 세종은 기라성 같은 분들의 도움을 힘입어서 땅 짚고 헤엄치기 하듯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종이 다른 왕들과 차별화되는 것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왕들과 세종의 가장 큰 차이가 있는데, 다른 왕들은 왕과 백성 사이를 철저하게 선을 그어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충구라면 충, 신이라면 신으로 해야 될 정도로 헌신적으로 왕을 섬겨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름지기 그것이 백성의 태도와 백성의 존재 목적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습니다. 선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를 애민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글을 창제해서 그들이 이용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었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장영실을 면천시켜서까지라도 그에게 많은 발명을 통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려고 했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북쪽의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아 내도록 여러 장군들을 동원해서 사군육진을 개척했습니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좋은 정치인들을 등용해서 훌륭한 정치를 펼쳐 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백성을 향한 임금의 사랑의 선을 넘어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이 한 시대에 함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조선시대 넘쳐나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다른 왕들은 선을 넘어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를 발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선을 넘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경계, 가장 두터운 선을 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을 넘어 이 땅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보내고 맞이하면서 나는 과연 내가 정해 놓은 선 안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나도 모르게 금을 긋고 선을 긋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예수님처럼 선을 넘어 가서 위대한 복음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를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선을 넘어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북쪽 지역을 다니셨습니다. 헤르몬 산 꼭대기와 가이사랴 빌립보, 그리고 갈릴리 가버나움까지를 다니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북쪽을 지나서 남쪽 유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라"(막 10:1)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유대 지경은 팔레스타인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요단강 건너편은 요단강 오른쪽 즉 동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 가셨는데 이 지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뢰아 지역입니다. 베뢰아 지역은 구약 시대에 보면 모압 사람들이 살던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의 그 설교를 하셨던 것이 바로 이 베뢰아 곧 모압 평지였고,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느보 산이 있는 곳이 이곳 베뢰아 모압 지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룻의 고향도 역시 모압 이방 땅이었습니다.

예수님 시절 신약 시대에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곳이었고, 과거 구약 시절부터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라서 예수님 시절에도 이방인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난한 자들, 소수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베뢰아 곧 요단 동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자기 집 드나들듯이 자주 다니셨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 금기시되는 지역이 있었는데, 첫째는 사마리아이고 둘째는 이방인 거주 지역이고 셋째는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당했는데 그때 앗시리아의 군대가 그곳을 주둔합니다. 그때부터 혼혈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 지역은 더럽혀진 땅이라 해서 사마리아 땅으로는 동행하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올 때나 남쪽 사람들이 북쪽으로 갈 때나 사마리아는 피해 다녔습니다. 이방인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는 전염의 위험 때문에 두려워서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곳을 자유롭게 다니셨습니다. 사마리아로 다니시고 이방인 거주지역도 자유롭게 다니시고 나병 환자 집단 거주지도 자유롭게 활보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곳에서 식사하시고 교제하시고 함께 떡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주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금기시하고 사람들은 그토록 꺼려 했던 곳을 예수님은 자유롭게 다니신 이유가 원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그런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예수님은 원래 지극히 높은 곳에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선을 넘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큰 선을 넘어 오셨으니 유대인 지역이면 어떻고 이방인 지역이면 어떻겠습니까? 사마리아도, 나병 환자들이 사는 집단 거주지도 주님은 자유롭게 다니셨습니다. 원래 주님은 선을 넘기로 작정하고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람들이 그어 놓은 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을 넘어 다니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토록 터부시하고 금기시하던 이 선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넘어 다니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유롭게 삼 년 동안 선을 넘어 다니셨습니다. 인간들이 그어놓은 선, 그 선을 넘어 가셔야만 구원의 대장정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선을 넘어 구원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선을 넘어 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