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거의 공식적인 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법으로 제정되면서 더욱 익숙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2004년부터 주 5일 근무제를 이미 시행해 왔습니다.
주 5일 근무제는 하루 8시간씩 5일을 근무하면 40시간이 되고, 주중 연장근무 12시간과 휴일 연장근무 16시간을 합쳐 일주일에 68시간 이상을 초과하여 일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령입니다. 그런데 14년이 지나 이제는 한층 강화된 주 52시간 근무제가 법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찬반양론이 있고, 지금도 사회가 이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현장과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조치가 아닌가, 지금은 52시간에 얽매여 있을 때가 아니라 더 열심히 일해야 할 때인데 시간을 너무 낮게 잡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이제 이러한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전 세계에서 주 5일 근무제를 가장 먼저 실시한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1936년에 시작되었는데, 이웃 나라 독일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30년이 지난 1967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 5일 근무제를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 5일 근무제를 넘어 주 52시간이 법으로 제정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젊은 세대의 인식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회사보다는 개인과 가정의 일을 훨씬 더 소중히 여깁니다. 한 세대 이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가정보다는 일터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직장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퇴근 이후에 저녁이 있는 삶을 그들은 삶의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워라밸의 핵심인 균형을 우리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 중심을 찾고 있는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질문해 보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5일간 학교에 나가고 2일은 쉽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삶이 편안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말에 학원을 더 열심히 다녀야 하고, 과외도 더 집중적으로 해야 하며, 학생들의 삶은 훨씬 더 빡빡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경제력은 있으나 부양할 가족이 없는 젊은이들은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유흥가가 넘쳐 흘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어, 시간은 있으나 경제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더 큰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쉼이 무엇인지, 왜 쉬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식일을 제정하신 말씀은 안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왜 쉬어야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들려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안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쉼의 이유와 목적이 우리 삶에 그대로 뿌리내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루셨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히브리어 '칼라(כָּלָ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다가 만 창조가 아니고, 하다가 걸쳐놓은 창조가 아니며, 완전무결하게 흠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흑암에서 빛으로의 창조였고, 혼돈에서 질서가 생겨난 창조였습니다. 공허했던 곳에 하나님의 창조 이후 가득 찬 채움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님의 죄를 미워하는 거룩한 본성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는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에 잘 순종하는 자, 이 사명대로 잘 살아가는 자, 그가 바로 복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고 살 걱정 없도록 복에 복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는 이처럼 완전무결한 창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이 안식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야말로 정녕 쉴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이제는 편히 안식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길게 살아봐야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월은 그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나라 갈 날이 가까워져서, 영원한 영혼의 안식에 들어갈 그날이 다가올 때, 우리 마음에 "나는 정말 사명을 다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했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겠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그 형상대로 성실하게 다스리며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일평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해 왔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조금도 어김없이 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자신 있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받은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편안히 누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받은 건강을 죄짓는 데 허비하며, 죄에 종 노릇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면, 불현듯 종말이 다가온다고 느낄 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구원을 얻는다 해도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께 고개도 얼굴도 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서 후배들과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 인생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제같이 다 부어졌다고 했습니다. 전제는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마지막에 부어드리는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포도주의 색깔이 붉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피를 포도주에 비유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렸는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내 피까지 하나님께 다 드림받았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바울은 하나님 앞에 사명을 잘 감당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안식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