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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확인하는 예술의 힘, 저항의 멜랑콜리

1. 재확인하는 예술의 힘

2015년, ‘고골과 멜빌에 비견될만할 헝가리 묵시록의 대가’이자 ‘베케트와 단테의 복잡한 언어성, 그리고 카프카의 감수성’을 지닌 작가로 평가받으며 맨부커상을 수상했던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그로부터 10년 후,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꺼낸 마지막 한마디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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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허우적거리는 '사악함'에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 사이에는 그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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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로부터 뿌리 채 뽑혀나간, 거세된 희망. 약속된 낙원의 배신. 붙박힌 듯 반복되는 연극 속 부조리한 인물들. 자기파괴적인 대중과 그보다 더 풍자적인 관료. 독자의 호흡을 허락하지 않는 독재적인 언어놀이. 세계의 모든 논리와 질서에 대한 회의. 이것들이 그의 소설을 정의할 수 있는 모든 이름들이다. 단연코 비관주의적 비전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그의 글 속에서 애써 예술의 빛을 찾으려는 시도는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끝이 없는 쉼표의 나열은 언어의 명료함을 흐리는 정도의 예술적인 혼돈이 아니라, 아주 잔인한 의도로 독자를 옭아매는 언어의 감옥이 된다. 그렇게 그는 우리를 결코 바란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폐쇄적인 진공상태의 지옥으로 인도해낸다. -적어도 책 안에서는-그가 빛이 있으라 말한다면 빛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새어들었을지도 모르는 모든 가능성은 논박되고 부정 당했으니, 빛은 불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를 예술에 대한 기만, 또는 언어도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에 대한 아무 믿음도, 희망도 없는 예술을 허용한다면, 여전히 ‘인문학의 질서 아래 있는’ 사랑스러운 이 세계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누군가는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한 문장을 읽고는 곧 바로 책을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책을 던지고 다시 청결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은 여전히 라슬로가 던져둔 공허한 언어의 늪에 묶여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웨덴 한림원이 말했던,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지닌 ‘예술적 힘’이다. 그의 묵시론적인 공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예술의 유일한 힘, 끈질긴 자기회전의 운동이다. 적어도 라슬로에게 있어 예술은 새로운 진리를 표현하거나 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예술의 힘은 오직 세계를 ‘재확인’해주는 행위에 있을 뿐이다. 마치 어제 뜬 태양이 그것의 자명한 공전 원리에 의해 오늘도 뜰 것이며, 그와 상응하여 어둠도 찾아올 것임을 확인시켜주듯이, <그럼에도 세상은 계속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언어가 지닌 유일한 예술적 힘이다.

2. 저항의 멜랑콜리

라슬로의 ‘묵시록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책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전쟁과 전쟁>은 각각 공동체, 시스템, 역사의 붕괴로 이어지는 인류 파멸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존속하기 위해 서있어야 한다고 믿어졌던 모든 토대-집, 국가, 그리고 역사-는 천천히 해체되어 무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 발 밑에는 끝없는 허공과 정지된 시간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말이 인류의 시작점, 즉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오는 원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흐르지만 흐르지 않는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서두에 인용된 헤라클레이토스의 글귀가 운동과 정지의 공리를 교란시키며 독자에게 세계의 모순을 상기시킨다. 세계는 운동하는가, 정지하는가? 저항은 운동인가, 정지인가?

I. 유일한 저항의 태도, 멜랑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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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은 종말이든 마지막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겠지. 그 사람들은 종말이든 마지막 심판이든 있을지 알지 못하니까… 그런 일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거야. 세상은 혼자서 상당히 행복하게 허물어지고 황폐하게 파멸할 거야.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게끔, 그래서 무한정 진행을 하도록. 이는 완전히, (…) 우주 공간에서 무력한 우리의 궤도비행만큼 명백한 일이니까.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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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멜랑콜리> 속 무기력한 지성의 의인화인 에스테르는 세계를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끈질긴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조화와 울림으로 된 전능한 마법, 가장 완벽한 수학적 공리’로만 믿어졌던 고전적 음악이 실은 피타고라스가 공식화해두었던 ‘부조화의 비례’를 베르크마이스터가 억지로 평균율로 고침으로써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집착한다. 우리가 듣는 음악은 ‘조화’라는 기만이며, 음악의 실체는 본래 ‘오류’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피아노의 음정을 본래의 부조화스러운 비례로 조율하는 그의 연구는 거의 광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 c장조는 삐걱거리는 행성 운동의 소리처럼 공허한 불협화음으로 들려온다.

문을 걸어잠근 채 좁은 방에 자신을 가두며,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거나 조율을 하는 에스테르의 기이한 행동은 실패한 이성의 자기징벌이자, ‘청결한 질서’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만해온 세계에 대한 저항이었다. 소설을 지배하는 라슬로 그 자신의 십계명, “움직이지 마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폐허가 된 무정부 상태의 마을, 이름도 없는 푸스타의 어느 한 마을에 공허한 종소리처럼 울려퍼진다. 이렇게 멜랑콜리는 우스울 정도로 무력한 개인의, 유일한 저항의 태도가 된다.

II. 실체없는 공포, 리바이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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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they build and what they will build

What they do and what they will do

is delusion and lies.

What they think and what they will think

is ridiculous

They think because they are afraid

And he who is afraid Knows nothing.”

(영화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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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의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되는 ‘황폐하고 파괴된 동유럽 농촌 마을’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리는 듯한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탄탱고>의 공간이 고립된 채 원형적인 제자리걸음으로 파멸에 다다른다면, <저항의 멜랑콜리>의 공간은 혼란스러운 외세의 등장으로 인해 직선적으로 파멸에 이르는 구조를 띈다. 곧, 햇빛이 들지 않는 안개 낀 하늘과 귀를 때리는 바람소리, 쓰레기가 산을 이룬 길거리보다 더욱 기만적인 상황이 들이닥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 시체를 실고 유랑하던 서커스단의 트럭, 길이를 채 가늠하기도 어려운 거대한 컨테이너가 기계적인 소리를 내며 마을에 들어섰다. 성서에서는 심판의 징조이며 철학자 토마스 홉스에게는 무제한적인 권력의 소유자인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이 굉음을 내며 도착한 곳은 모든 희망이 끝나고 심판이 시작되는 대지의 끝자락이었다.

만에 하나 성서의 욥이 신의 심판을 막고자 했었더라면, 그는 리바이어던을 먼저 막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서의 혼돈 끝에 생겨난 완전한 붕괴의 형상, 유랑 서커스단의 대왕고래는 그 자체로는 ‘사체’라는 점에서 의문을 갖게 한다. 기묘한 서커스단은 마을의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고, 온갖 뜬 소문으로 부풀려져 사람들은 정작 트럭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것이 만약 고래라 할지언정 자신들이 정말 죽은 고래의 서커스를 보고싶어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광장에 모여든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래를 둘러싼 모든 정황들 사이 단 한가지만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 어떤 사람도 그 기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리바이어던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것처럼.

묵시록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성서의 리바이어던은 동시에 만인의 권리를 소유할 절대권력을 지닌 홉스의 리바이어던이기도 하다. 생명 없는 공포의 형상, 고래 사체의 뒤엔 서커스를 가장한 폭동을 계획한 대공이 있다. 끔찍한 기형이라는 것 외에는 대공 또한 실체가 알려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대공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명령하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하지 않는 명령에 따르는 ‘집단’만이 있다.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조종자(대공)에 의해 조종당하며, 원인 없는 공포(고래)에 잠식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