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마가복음 1:21-28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받고 싶어 하는 상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영 상입니다. 그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주는 상으로, 1956년에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이영 투수는 1890년부터 1911년까지 22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며 통산 511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대투수입니다. 그의 본명은 따로 있었으나, 그가 던지는 폼이 마치 사이클론 같고 공의 위력이 태풍과도 같다 하여 사이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지닌 권위는 지금까지도 모든 선수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사이영 상이 있다면 일본에는 사와무라 상이 있습니다. 사와무라는 통산 63승밖에 올리지 못한 투수였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선수였습니다. 1934년 미국 올스타 팀이 일본을 방문하여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그 팀에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여덟 살의 사와무라가 루 게릭을 비롯한 타자들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자 일본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사와무라는 초창기에 세 차례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44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와무라 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습니다.

야구 선수라면, 특히 투수라면 누구나 사이영 상이나 사와무라 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권위 있는 상입니다. 우리는 야구 선수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도 가장 귀한 권위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권위의 출처가 어디인지 살펴보고, 그 권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장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권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 권위의 근원

2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니." 서른이 넘은 청년 예수께서 네 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 회당에서는 구약 율법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가지고 받은 은혜를 사람들과 나누셨고, 그 나눔은 어느덧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 풀이와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22절의 사람들 반응입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여기서 '놀라니'라는 말은 원문에서 '엑플레소'(ἐκπλήσσω)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에크'(ἐκ)와 '플레소'(πλήσσω), 두 단어가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어디어디로부터'라는 뜻이고, '플레소'는 '때리다, 치다, 강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합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강한 감동이 있었고, 내면 깊숙이 스며드는 큰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서로 나누었습니다. 도대체 이 놀라운 권위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서른이 넘은 청년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말씀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마가복음 앞부분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위는 크게 세 가지로부터 기인했습니다.

1-1. 겸손에서 나온 권위

첫째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셨는데,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과 동일함을 덧입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권위를 갖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위적인 것과 권위 그 자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본래 권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말에 힘이 없고 능력과 권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권위적으로 변합니다. 나이, 지위, 재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억누르고 억압합니다. 이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에게 진정한 권위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와 권력과 지위 때문에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할 뿐입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정말 권위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늘 보좌를 다 버리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분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어찌 권위 있는 말씀이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겸손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권위가 생겨난 것입니다.

1-2. 훈련에서 나온 권위

둘째로 예수님은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사탄의 혹독한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들짐승들이 주변에서 울부짖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라고 생각하며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헤롯을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모습입니다.

고위 공직자가 자신의 병역을 면하고 자녀의 병역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면제해 준다면, 어떻게 그가 존경받고 권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공직자가 그래서는 권위가 생기지 못합니다. 훈련받아야 하고 연단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한 고통과 고난을 온몸으로 겪을 때,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난의 현장에 계셨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고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1-3. 언행일치에서 나온 권위

셋째로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말씀과 행함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이 입에서 나와 허공에 흩어지는 말잔치로 끝나지 않고, 말씀이 행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이루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고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다" 하시고 가난한 자의 손을 잡아 주셨으며 병든 자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일치였습니다. 구약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서기관의 권위 부재

그런데 22절 끝에 보면 서기관들의 것과는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말씀을 전하는 전문가들 아닙니까? 그 당시 서기관들은 회당에서 늘 말씀 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말씀을 다 외고 있었습니다. 주석도 알고 있었고 주석의 주석까지도 꿰뚫고 있는, 말씀에 관해서는 박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서기관들의 말에는 권위가 실리지 않았을까요? 왜 서기관들은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위적으로 사람들을 억압했을까요?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서기관들은 사거리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경건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이 조달한 헌금을 자랑했고 금식하는 것도 과시했습니다.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의 권위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