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못하리니 (눅 1:18-25)

권위와 권력, 권세를 의미하는 한자 '권(權)'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저울추'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와 권위를 뜻하는 이 한자가 어떻게 저울추가 될 수 있는지 굉장히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옛날 저울을 보면 달고자 하는 물건을 한쪽에 걸어둡니다. 그러면 무쇠로 만든 저울추를 반대쪽에 답니다. 그런데 이 저울추가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균형을 맞춥니다. 딱 좌우 수평이 되는 그 지점에서 눈금을 읽으면 바로 그 물건의 무게가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저울추가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좌우로 왔다 갔다 합니다. 물건이 무거우면, 또 물건이 가벼우면 물건의 무게에 따라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움직입니다. 즉 저울추가 움직이는 것처럼 권위라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가진 권위는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세상에 없는 논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논문이 특별하다고, 탁월하다고 인정해 주어야 그 논문의 권위가 실리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음으로 권위를 가집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어른이 있는데 그 어른이 진짜 어른으로서 권위를 가지려면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데 나 혼자 권위 있다고 생각하고 권위를 주장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적인 사람들과는 함께하기가 힘듭니다. 같이 있으면 굉장히 불편하고 어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1. 절대적 권위의 하나님

사람의 모든 일들은 이렇게 권위가 상대적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하실까요? 하나님은 사람처럼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선 온 세상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도 지으셨습니다.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고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팔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 보면 절대적 하나님 권위의 말씀을 의심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분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그분이 어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지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권위의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지를 함께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사가랴의 불신

사가랴는 참으로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분은 시대적 암흑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인데도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주 소박한 소원인데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기의 직무를 수행해 나갑니다. 성전 안에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하나님이 보낸 주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주의 천사가 그의 가정의 소원을 말씀합니다. 이어줍니다. 너희 가정에 주겠다고,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그 아들은 너희 가정에 즐거움이 되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놀라운 주의 천사의 현현을 목격한 이후에 사가랴의 반응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천사의 임재에 대한, 천사가 요한을 너희 가정에 주겠다고 한 말에 대한 사가랴의 응답입니다.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도 늙고 내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이 말은 기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즐겁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젊을 때 그렇게 구할 때는 하나님 응답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다 늙어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제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이미 나이가 많습니다.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것 아닙니까? 기쁜 것은 기쁜데, 행복하기는 행복한데, 그런데 하나님 앞에 시기와 때에 대해서 볼멘소리를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2-1. 사라의 전례

그런데 이것은 사가랴만이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불편한 감정을 나타낸 사람이 더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그중에 사라가 그렇습니다. 창세기 18장 10절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사라의 나이 65세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그때 주셨습니다. 그때가 딱 좋았는데, 그때가 정말 나도 정말 간절했는데, 이제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은 지가 정말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여성으로서의 기능이 끝났습니다. 내 남편도 이제는 기력이 쇠해서 더 이상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사라가 웃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가랴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 좋은 분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말씀하셨던 분들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자기의 때, 내가 원하는 가장 적절한 때, 내가 원하는 최고의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니까 이런 식의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때

그런데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데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데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패턴을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몇 년이나 했습니까? 무려 430년입니다. 430년 동안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건져 달라고, 살려 달라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30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무려 430년입니다. 430년을 지연시키다가 나중에 시간이 다 지나서 이제는 그들이 다 무력해졌을 때, 이제는 시큰둥해졌을 때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셔서 내가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겠다고 말씀합니다. 430년을 지연시키셨습니다.

초대교회 베드로가 감옥에 들어갑니다. 처형당하기 직전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즉각 응답됩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옥에서 손잡아 직접 이끌어내 주셨습니다. 기도하자마자 그것은 하루가 되지 않아서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430년이 지나서야, 하나는 즉각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패턴이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공식이 있습니까? 두 기도 다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 두 기도 다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기도요, 또 한 기도는 지도자의 석방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우리 편에서 모든 것을 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다는 점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좋은 시기,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적절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루시거나 혹은 당기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그 기도에 담아서 응답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것은 지연시키시고 어떤 것은 당겨 주시고. 사가랴의 기도, 엘리사벳의 기도를 지금까지 지연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예수님이 오실 그때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실 그 시기가 정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실 때는 예수님보다 딱 6개월 먼저 오시면 딱 좋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최고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젊을 때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예수님보다 너무 일찍 오셔서도 안 되고, 예수님보다 뒤에 오셔도 안 되고, 같이 오셔도 안 됩니다. 예수님보다 딱 6개월만 먼저 오셔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으로는 이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 좋은 사가랴조차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조차도. 그런데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큰 믿음, 성장하는 믿음, 넓은 믿음, 좋은 믿음은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맡겨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비록 수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시기에 이루실 줄을 믿고 하나님께 위탁하고 의탁하는 큰 믿음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3. 가브리엘의 선언

19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Γαβριήλ)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가브리엘이 당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보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으니까 가브리엘이 말합니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나는 보내심을 받았다고. 그런데 이것이 사가랴나 엘리사벳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나쁜 소식도 아닙니다. 젊어서 주셨으면 최고의 소식인데 기쁘기는 하나 걱정도 앞섭니다. 이제 어떻게 키웁니까?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늙었는데 내가 세상을 떠나면 이 아이는 누가 돌봐 줍니까? 막막합니다. 힘이 듭니다. 그런 마음이 불평으로, 불신으로 입으로 나와 버린 것입니다.

3-1. 입을 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