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주제 : 족대, 상황적 지식, 탈식민, 몸, 트랜스로컬

1. 족대와 상황적 지식들

흐르는 강물에 직접 몸을 담그고 족대를 내려 그물을 건져 올리는 족대질로 환유될 수 있는 앎이란 족대를 댐으로써 에 누적되는 흔적과 족대를 대고 있는 부분에 관한 지식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족대로부터 글을 연 이유는 오픈자습소 준비를 위한 세미나에서의 공동기획자 김은성의 말에 있다.

<aside> 🧭 강물에 직접 몸을 담그고 족대를 내렸을 때 몸에 누적되는 경험, 흔적, 감각들이 있다. 그런데 흐르는 강물이 전체적인 모습이라면 나는 족대를 대고 있는 그 부분만 안다. ‘내가 족대로 건져낸 것이 이것이었구나!’ 모두가 각자의 족대를 가지고 있고 자기만의 족대로 어느 한 지점에서 족대를 대고 건져 올리고 있을 텐데, 족대를 댄 감각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체험적인 지식은 연구팀에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마치 물고기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처럼. 그러므로 기획, 연구 … 우리는 각자 자리에서 서로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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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가로지르기-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는 그간 어떤 곳에서 어떤 족대를 들고 무엇을 건져 올렸을까? 그것은 출몰과 어떻게 연결되며 출몰의 행위를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에 앞서 족대질로 환유될 수 있는 앎이란 어떤 것인가? 족대질로 건져 올린 것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날 것의 현장에만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이 기획, 연구, 관찰, 기록, 디자인 어느 것에 있든 우리는 자신만의 족대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가 앎의 행위다.

  1. 족대질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족대를 이용한 어로작업은 무릎 정도 높이의 강물에 직접 들어가 발을 담그고 족대를 바닥에 대고 밀어 올려야만 가능하다. 앎 역시 몸을 맞대야만 알 수 있는 신체적인 것이다. 몸을 갖는다는 것은 몸과 함께 한정된 관점을 갖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인식하고 지식화하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다. 몸에 남겨진 흔적과 감각은 어떤 지식, 개념, 주제이든 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우리가 쥐고 있는 족대는 몸이다. 족대는 본래 형태를 따로 갖는다기보다는 하천의 특성, 어종이나 어로의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생태환경의 특성을 반영한 산물이다. 몸도 단일하고 보편적인 객관성의 실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차이를 생성하는 몸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고정되거나 완료된 실체가 아닌 변형, 변신, 변화하는 몸으로서 강물과 마주한다.

  2. 자기만의 족대가 앎을 설명한다. 족대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분적인 세계다. 도나 해러웨이는 ‘상황적 지식들’이라는 개념을 통해 “부분적인 시각만이 객관적 시력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부분적인 시각이란 체현된 시각으로부터 객관성을 의미한다. 시력의 개입 없이 주어지는 대상은 없으며 번역과 해석 행위 없는 투명한 시각적 반영물도 없다. 이때 시력은 초월적 이성이 아닌 감각하는 몸에 관련한다. 상황적 지식들은 해러웨이가 개와 함께 산책하면서 색깔과 사물을 구별하고 시력을 나타내는 눈의 중심와, “색깔을 보는데 필요한 극소수의 망막 세포 대신 냄새를 다루는 거대한 신경 처리와 감각 뇌피질부가 있다면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하다가 얻은 교훈”(341)의 결과다. 이 일화로도 알 수 있듯 해러웨이에게 시력은 근대, 보편, 남성, 이성이라는 단어와 관련한 ‘투명한’ 시각이 아니라 몸의 물질적 상황과 함께 있는 눈이다. 그리고 이 체현된 시각이 볼 수 있는 세계는 오직 부분적이고 장소특정적인 세계다. 족대를 쥔 몸과 그 몸이 있는 강물 속 어딘가가 부분적이고 장소특정적인 것처럼 말이다.

  3. 족대를 대고 있는 부분만 안다. 이는 상황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은 지식이다. 상황적 지식들은 페미니즘 인식론, 과학, 객관성과 관련한 논쟁 가운데 제안되었다. 지식은 상황으로부터 분리되거나 상황을 초월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황 내 지식 주체들과 지식 대상들의 접속과 연대의 과정에서 가능하다. 또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치들의 권력관계와 작용에 민감한 대화와 번역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객관성이 지식이 처한 상황성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지식의 체현된 객관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적 지식들은 초월의 입장에서 보편적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고 모든 것을 역사, 사회,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급진적 구성주의와도 다르며 또한 체현된 객관성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모든 객관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와도 다르다. 해러웨이에게 상황이란 체현, 몸이며 그런 점에서 상황은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지 않는다. 그는 고정적, 수동적, 대상적인 것으로서 몸을 제외하는 지식 논쟁을 비판하며 그런 의미에서 물질/기호로 이분화되는 게 아니라 물질-기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몸을 중요하게 여겼다.

  4. 강물은 흐르고 족대는 고정적이지 않다. 해러웨이는 “체현이 구체화된 몸속의 고정된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장들 속에 있는 혹들, 정위 속의 굴절들, 물질적-기호학적 의미의 장 속에 있는 차이의 책임 등에 관한 것이라 말한다”(349). 족대를 쥔 몸, 그물이 내려진 강물은 자연/문화로 이분화될 수 없는 자연문화의 이질적 결합들, 물질과 기호를 가로지르는 물질-기호다. 강물과 족대는 동시에 얽혀 움직인다는 점에서 유동적이고 운동적이다. 이 운동은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변화가능하다. 우리는 물질-기호적 몸이 갖는 상황성과 객관성을 반영하여 지식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는 많은 것들과 얽혀 있다. 족대를 댄 감각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것을 해석하는 행위조차 족대질이며 부분적인 지식이다. 부분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연루된다. 불완전하게 연결된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족대를 쥐고 있으며 체험과 해석의 여지를 넘나들면서 서로에게 영향받는다. 우리의 뿌리내린 앎은 최종적으로 완료되지 않으며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다.

2. 로컬과 ‘나’라는 지리적 몸

이 글에서 상황적 지식들의 출발점은 로컬에 있다. 로컬은 일종의 규범화되거나 행정적인, 또는 이미지화된 언어로서 지역/지방과 달리 생성적인 관계적 공간으로 이해되고 연구되어왔다. 로컬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비고정적으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공간, 즉 관계 형성의 공간이다. 나는 개인들의 단순한 군집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 다양성, 소수성, 타자성을 바탕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 느슨하고 개방적인 로컬리티가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나는 로컬을 말하기 위해 지역/지방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로컬을 말하는 것이 그리 산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와 지역, 수도권과 지방에 관한 이분법적 위계 구조와 그것을 표상하는 지역/지방 재현에 관한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글을 써왔다. 지역/지방에 관한 상상력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관광 소비나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 생각되거나 전근대적이고 낙후된 장소로 상상되곤 한다. 대안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 날 것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존재하는 장소로 신비화되기도 한다. 지역 청년을 다루는 단골 주제는 늘 이주이며 유출과 유입, 떠남과 남겨짐이라는 이분화된 선 위에 놓인 존재들로만 숫자화된다. 이렇다 보니 지역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삐거덕거리고 어깃장이 난 사람들이라는, 그들에게는 일종의 감정들, 예컨대 억하심정, 자기비하, 양가감정들이 존재한다고도 한다. 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 끊임없이 지역/지방이라는 대상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만든다.

나는 그간 의도된 오류와 오독으로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을 지역/지방적인 것의 재현이라는 주제에 덧대어 살펴봤다. 지역/지방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상상과 지식의 결합 효과로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첫째,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지역/지방적인 것으로 호명된다는 것과 둘째, 지역/지방의 재현을 비판하는 나의 논리가 빈곤하다는 것이었다. 지역/지방적인 연구자로서 청중에게 무언가 말해야 하는 대표성의 요구가 불편했고 비판 외에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곤란하게 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로서 재현 비판이 내 담론 권력을 위한 도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지점에서 지역 연구는 무엇인지, 지역 연구가 연구하는 지역은 무엇인지 다시 알 필요가 있었다.

지역 연구라는 어휘는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맥락이라기보다 지역을 잘 다루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말이다. 지역 연구라는 이름 아래 비서구 지역을 서구 연구자들이 개입하고 관찰할 수 있는 현장으로 삼으면서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기준 아래 지역을 전근대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식은 제1세계에 있고 연구되는 문화는 제3세계에 있다는 의미에서 지역 연구라는 말은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되어 있다. 서구 근대성이라는 지정학적 특권을 내세우면서 지역을 주변화하기 때문이다. 행정부, 사회과학, 기업의 요구가 결탁해 만들어낸 지역 연구도 지역을 국가 위계적이고 행정 수직적인 의미에서 단계적인 위치에 놓는다. 지역 연구는 지역이라는 장소를 현장으로 바꾸어 관찰과 기록을 통해 표상될 필요가 있는 곳으로 의미화한다. 이런 방식의 지역 연구는 도구적 합리성이나 효율성에 편향된 자신의 논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와 분석으로 삼고 국가적 필요와 이해관계라는 동기에 의해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