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2:15-20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책망을 받기도 하고 책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책망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망한다는 대원칙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이 나이가 어리거나 직책이 낮은 사람을 따끔하게 꾸짖어서 그들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엉망이고 책망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책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직책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상대방을 책망해야 하는 책망의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윤동주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시대를 책망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수많은 어른들과 정치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습니다. 명동촌 서전서숙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더 넓은 곳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넓은 곳이란 곧 일본을 의미했고, 그에게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는데, 민족의식이 투철한 윤동주로서는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공부하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뜨거운 공부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서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떠납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1942년에 일본 동지사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깊은 양심의 가책이 자리잡았습니다. 내가 민족의 혼을 팔아먹고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구나. 그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합니다. 결국 체포되어 1943년에 감옥에 들어가고,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감옥에서 약 백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시들은 대부분 그가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작인 「별 헤는 밤」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자기 이름을 써 보았다가 흙으로 덮어 버린 이유, 그리고 이름을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유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창씨개명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시 「서시」의 일부분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왜 부끄러워했겠습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왜 괴로워했겠습니까? 이름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이렇게 감옥에서 약 백여 편의 시를 쓰면서 자신의 창씨개명을 돌아보고 해결하고 돌이키고 참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향한 참회인 동시에 그 당시 나라를 팔아먹었던 수많은 정치인들과 어용 지식인들, 매국노들을 향한 강력한 책망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윤동주였지만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 본문을 보면 바로에게 책망받는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의 왕에게 책망당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책망해야 하는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책망하는 자리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받고 부끄럽게 손가락질당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를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준비된 땅에 왔을까 하는 부푼 기대를 가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게다가 기근까지 닥쳤습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련의 장소, 울타리를 뛰어넘어 간 그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래는 거짓말을 합니다. 두 사람이 부부 사이인 것을 숨기고 남매 사이라고 말합니다. 순식간에 아내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까지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는 아브라함에게서 사래를 데려가면서 거저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를 후대했습니다.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창 12:16)
그 당시 고대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성을 노동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친정집에서 여성을 데려가면 그만큼의 노동력이 상실됩니다. 그 때문에 남자는 여성의 가정에 여성의 노동력만큼의 돈과 물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결혼 비용입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까지 많은 물품들을 주고 사래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는 '후대하다'라는 말입니다. '후대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타브(יָטַב)'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때 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다 할 때 이 '야타브'를 쓰는데, 왜 바로는 하나님도 아니면서 이 단어를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해 두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로가 마치 신적 권위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처럼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많은 것을 주고 그의 아내 사래를 데려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기근을 해결하고 먹고 살 것이 평생 동안 차고 넘치는 엄청난 재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입장에서 보면 티끌 같은 것, 먼지 같은 것, 쓰레기 같은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입니다.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 따위를 줬다고 해서 그에게 얼마나 손해가 되겠습니까? 바로는 먼지와 티끌 같은 것만 주고 아브라함에게서 전부를 데려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는 그의 인생의 전부입니다.
세상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이렇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전부를 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때 가져가는 것은 참혹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그들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나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의 거짓 소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전부를 잃었는데, 기근이 해결되었다고, 나는 아내를 주고 이 많은 물질을 받았으니 기쁘다고 말했다면 그는 심각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 마귀도 이런 식으로 주님을 유혹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악한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에 들게 합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만약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는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마귀에게 있어서 천하만국의 영광과 세상의 모든 물질과 공중의 권세는 티끌과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의 이런 유혹의 본체를 잘 눈여겨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전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의 믿음을 잠깐만 접어 넣어 두라.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너의 믿음을 잠깐 멈추고 접어 넣어 두면 너는 많은 돈을 벌 것이다. 물질을 얻을 것이다. 너는 출세하고 명예를 얻고 건강을 얻고 네 가정은 앞으로 대대손손 행복할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잠깐만 접어 둘라."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거래를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