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정하게 생각이 나면 좋을 텐데, 사실은 그저 결혼이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잡아먹으 수 있다는 경고로 떠오른다는 게 슬펐다. 더 솔직히는 슬프기보다 두려웠다.
- 사고 전에 재욱이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오로지 술집 여자들뿐이었다. 다른 직업군이 한둘 섞일 뻔도 한데 예외 없이 술집 여자였다. 짧은 동거에 들어가거나 관계가 깊어지면 아빠가 자는 사이 집 번호나 가족들의 핸드폰 번호를 훔쳐내 자꾸 전화를 걸어오는 여자들이었다. 이혼해달라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했다. 불안한 여자들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같았다. 같았고 집요했다. 그렇게 시달리다 보니 책이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신비하고 사연 있는 술집 여자’ 캐릭터를 볼 때마다 욕이 나왔다. 신비는 얼어 죽을. 사회구조적인 원인도 크겠지만 냉철하게 보면 자기 내부의 불안을 주체하지 못해 그런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닌가, 세 사람은 질려 하며 생각했다. 한번은 재훈에게까지 전화를 걸어와서 재인이 빼앗아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던 적이 있다. 배운 적 없는, 어디서 스며들었는지 모를 욕설이 줄줄 나왔다. 엄마 딸다웠다. 신비화는 대상이 멀리 있을 때나 가능하다는 걸, 인생에 구질구질하게 난입하기 시작한다면 결코 할 수 없다는 걸 그런 식으로 깨달았다.
-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는 엄마를 내려주고 대전으로 돌아가며 재인은 생각했다. 이십 대 내내 가장 힘들게 배운 것은 불안을 숨기는 법이었다고 말이다. 불안을 들키면 사람들이 도망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사방팔방에 자기 불안을 던져서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없다. 가방 안에서도 쏟아지지 않는 텀블러처럼 꽉 다물어야 한다. 삼십 대 초입의 재인은 자주 마음속의 잠금장치들을 확인했다.
- 재인에게는 비밀스러운 싱킹 플레이스(thinking place)가 있었다. 대전 사람들은 웃고 말겠지만 엑스포 공원이었다. 연구단지에서는 차로 이십 분쯤 걸렸다. 대전 엑스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쓸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낡고 휑하고 멈춰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서 생각하기에는 더 좋았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면 꿈돌이가 맞아주었다. 언젠가 재인에게는 꿈돌이가 서핑을 하는 작은 큐브가 있었다. 밀도가 다른 액체를 이용해 바다를 작게 재현한 장난감이었는데 재인은 꽤 좋아했다. 그 작은 바다는 어디에 버려졌을까. 버린 기억도 없는데 사라졌다. 그렇게 많이 생산되었던 꿈돌이 상품들이 지금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 가끔 궁금했다.
- 사진을 전송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재인은 끝내 보내지 못했다. 쓸데없이 체면이나 위신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아주 질색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동생들에게 설명하지 못할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 일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쩔 수 없이 첫째였다.
- 손톱은 무기였다. 문명사회에서 태어나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무기였다. 경아를 도왔으니까, 한동안 정신없었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끝나게 될까 싶었다. 이상하게 아쉬웠다. 무기를 가지고 있는 기분,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의지는 재인에게 활력이 되었던 것이다. 재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자아이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
- 엄마가 점점 서럽게 울었다. 엄마는 분명 일부러 떨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13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전경을 보며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혹은 떨어지고 싶다고 내내 생각해온 게 아닐까 재인은 의심했다. 모녀만이 서로 꿰뚫어볼 수 있는 뒤통수의 표정 같은 게 있어서 엄마를 볼 때 아슬아슬했던 것이다. 사고였지만 이제 정말로 한 번 떨어졌으니 집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아빠의 집을.
- "나 저런 이야기 싫어해. 백인 남자가 억압받는 아시아 여자를 구해주는 거잖아. 아시아 여자는 왜 맨날 구원받는 역할밖에 못해? 됐다 그래."
영화가 중간까지 왔는데도 별로라 재인이 불평했다.
"이 영화가 재미없는 것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재인과 재훈은 재욱이 덧붙인 말을 도움을 준 사람 쪽의 심리적인 보상을 뜻하는 것으로 알아들었지만, 사실 직접적인 의미였다. 재욱과 산제이가 수도에 가 있는 동안 플랜트에서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용접 중에 감전 사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다쳤는데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구역은 휴가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담당했을 구역이었다. 두 사람이 아이들을 구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두 사람을 구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 둘이었습니까, 재욱은 가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