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이원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547년에 태어나 1634년까지 87세를 살았던 분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하신 분입니다. 그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면서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어려웠던 시절에 온갖 영화를 다 누렸겠구나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광의 자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영의정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도 백성들과 함께 지냈던 참으로 훌륭한 재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그분은 산속의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살던 오두막집 문을 산지기가 벌컥 열어젖히더니 한 아이의 멱살을 잡고 왔습니다. 아이를 그 집으로 밀어 넣으면서 큰 소리를 지릅니다. "이 아이를 내일 내가 포졸을 데리고 올 때까지 여기다가 잡아 두시오. 아이가 도망가면 당신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그리고 아이에게도 소리를 지릅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여기서 꼼짝 말아라. 내일 포졸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문을 닫고 사라졌습니다.
이원익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아이가 울면서 대답합니다. "날씨는 너무 춥고 땔감은 떨어지고 어머니는 아프셔서 제가 산에 나무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무 하다가 산지기에게 그만 이렇게 잡힌 것입니다." 그 당시 임진왜란 직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원익이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돈을 주고 말합니다. "내려가도 좋다. 원하는 만큼 나무를 해서 집에 가서 군불을 때 드려라." 그리고 보냅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나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 나라의 임금님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안심시키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산지기가 포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없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엄포를 놓습니다. "이제 당신이 관아로 끌려가야 되겠다." 그러던 차에 이원익을 모시러 온 가마 행렬이 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재상이었지만 항상 백성들과 같은 삶의 현장에 머물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어에도 능통했습니다. 그 당시 배운 사람들은 글은 썼지만 말은 통역관인 역관에게 맡겼습니다. 그들이 직접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천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사신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임금님의 생각을 직접 사신들에게 전하고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경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광해군 때의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실시한 사람이 되었고, 선조 시절 이순신이 모함을 당했을 때 앞장서서 이순신 구명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파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서인의 거두였던 율곡 이이가 동인이었던 이원익을 중요한 사간원 자리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에게 당파를 초월해서 존경받았던 그가 서 있었던 자리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네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지금 너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느냐, 아니면 네가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느냐?" 오늘 우리에게 이 질문이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나는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를 거니셨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사랑을 한다면 십자가를 져야 됨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했으면 십자가 지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6일이 지났습니다. 6일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헤르몬 산 꼭대기로 올라가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나 있는데 왜 하필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사도행전을 보면 이 세 분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각양각색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훗날 교회 지도자가 되실 분들을 따로 데리고 다닌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여기 이 변화산 사건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세 분을 따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뜻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가 읽은 2절 끝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3절에 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영광의 광채 가운데 계셨습니다. 세상에 빨래하는 사람이 더 이상 희게 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가 그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4절에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이미 천국에 가신 엘리야와 모세가 변형되신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산꼭대기입니까, 아니면 천국입니까? 이 자리는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가셔서 헤르몬 산 꼭대기에서 천국의 모형을 잠깐 보여주셨습니다.
장차 너희가 천국에 오면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이다. 너희 모습이 아름답게 변형될 것이고, 영광의 광채가 너희를 뒤덮을 것이고, 먼저 간 믿음의 조상들이 너희들과 함께 행복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거리가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계셨을까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위인이 있었을 텐데 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셨을까요? 이 세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분의 공통점 첫 번째가 십자가를 지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모세도 그러하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우선 모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 40년, 40년으로 나누어 보면 초기 40년은 애굽 왕자로 보낸 40년입니다. 부유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기 40년은 그가 자신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처가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외로운 4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이 가득한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40년, 80세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영광스럽기보다 고생스러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40년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짊어지고 갔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십자가는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를 통해서 살펴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원망 불평입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먹거리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낮에는 더워 죽겠다고, 밤이면 추워 죽겠다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는 돌을 들고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40년 동안 그들을 출애굽 시켜 가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뜨거운 사막 길을 건너가면서 사람의 십자가를 온전히 짊어지고 갔던 사람, 그분이 바로 모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