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복이 될지라

본문: 창세기 12:1-4


자유민주주의가 선택한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이고, 사회주의가 선택한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꼽으라면 단연 사유재산 제도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공산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북한의 실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북한 가정에도 텔레비전이 있고, 심지어 북한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잘못된 것인가, 혹시 저것도 당에서 대여해 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도 텔레비전과 휴대전화 정도는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생산수단은 결코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산수단이란 토지나 공장, 기업 같은 것을 말합니다. 쌀과 농작물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는 토지,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는 공장과 기업 등은 공산 사회에서 철저하게 국가와 당의 소유입니다. 모든 국민은 다만 노동자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꿈을 꿀 수도 없고, 설령 꿈을 꾼다 하더라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노동자라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면, 누가 꿈을 꾸고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하지만 좋은 의미에서 기업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용을 창출하고 연구개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영적인 영역으로 옮겨보면 복의 곁가지만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지어 나누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을 평생 따라다니고 복의 곁가지만 쫓는 인생이 아니라,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만들고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원천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복 자체가 되게 해 주셨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역시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지어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함께 세워 가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 길을 결단하고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떠나가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게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한마디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떠나서 가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곳은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그곳을 떠나서 영적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가야만 했건만 중간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죽은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하란'에 멈추어 서서 과거에 발목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데라에게 향한 소원을 거두시고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제는 네가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가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습니다. 일단 혈육의 정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살아계신 아버지를 두고 떠나가는 것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돈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보장된 유산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기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을 아직 가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여 주실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답사도 해보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사실 떠날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위인들을 통해서 "떠나가라"는 메시지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공생애의 삶을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너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고 재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 사건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연못에는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그때 일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병 낫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연못에 들어가서 보시니 삼십팔 년 된 병자가 보입니다. 그 연못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삼십팔 년 동안 병자로 살았는데 왜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낫고 싶고, 당연히 일어나서 건강하게 다니고 싶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7-8)

이 사람은 "예수님, 저도 어서 병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주변을 원망하고 핑계거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누구도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서 제가 이 모양 이 꼴로 삼십팔 년째 그 자리에 이러고 앉아 있습니다. 주변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핑계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의 모두가 불평불만입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 병 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지금 네가 삼십팔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무는 그 자리를 둘둘 말아 걸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망의 자리, 불평의 자리,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마음이 상한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원망하고 앉아 있으려고 하느냐, 언제까지 불평하고 언제까지 남 탓하고 핑계대고 앉아 있으려고 하느냐, 이제는 핑계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고, 병이 나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초막절 잔치 마지막 날에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돌멩이 하나씩을 쥐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던져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손으로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갑니다. 예수님과 여인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우리 예수님이 무작정 이 여인을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정욕의 자리, 음란의 자리, 죄의 자리를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남모르게 은밀한 죄의 낙을 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계시니, 이제는 일어나서 죄의 자리를 청산하고 떠나가라,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죄 지으면 너는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고 더 이상 해방될 수 없으니, 이제는 죄의 종 노릇하지 말고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 하셨고, 혈육의 정에서 떠나가고 먹고사는 문제에서 떠나가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떠나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망의 자리에 매여있는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고, 죄악을 누리고 있는 여인에게는 "이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떠나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어디에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고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정의 고민들,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이 한 뼘도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청산하려고 해도, 빨리 벗어나고 일어나서 떠나가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거기에 발목 잡혀 살고 있는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관계와 혈육의 정 때문에, 원망과 불평 때문에, 남모르는 은밀한 죄의 낙을 누리는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떠나야지, 떠나야지, 이제는 청산해야지, 이제는 청산하고 떠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결단하면서도 매번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들이 왜 없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떠나가라고. 이제는 네가 머물러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가야 너희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마음만, 생각만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행동하고 보여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 요구와 요청에 충실하게 응답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 자체가 되게 하시는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