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본문: 창세기 11:1-9

사람들과 소통할 때 우리는 말과 글을 사용합니다. 말로 소통할 때 중요한 것은 듣는 자의 경청하는 태도와 말하는 자의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들을 때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며, 말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와 수준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대화 상대가 초등학생인데 대학생 수준의 용어로 말한다면 그 사람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글로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쓴 글을 읽을 때는 성심껏 깊이 들어가야 하고, 내가 글을 써서 상대에게 전할 때도 상대의 수준과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소통하는 상대가 문맹일 경우가 있습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경우, 글로는 소통할 수 없으므로 또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17세기 로코코 시대를 살았던 윌리엄 호가스는 아주 특별하고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호가스는 그 당시 유명한 풍속화가로서, 영국의 사회상과 상류사회를 그림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당시 17세기 영국 사회에는 문맹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글로 소통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호가스는 그림을 통해 사회상을 고발하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하면 연작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계약 결혼'이라는 주제로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편에는 백작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의 오른발이 붕대로 감겨 있습니다. 통풍 때문에 오른발을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 백작의 지위가 몰락한 집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 중간에 보이는 창 밖으로는 폐허가 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백작이 짓다 만 건물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물을 올리다가 중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는 금화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이 돈을 가져온 사람은 백작 맞은편에 있는 상인입니다. 부유한 상인이 왜 그 돈을 건넸을까요? 상인의 딸과 백작의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돈을 건넨 것입니다. 백작은 상인의 돈이 필요했고, 상인은 백작의 명예와 권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백작의 아들과 상인의 딸은 어떠할까요? 화면 왼편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등을 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결혼을 계약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윌리엄 호가스는 그 당시 상류사회의 위선적인 모습과 영국 사회의 기만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만약 호가스가 글을 통해 당시 사회를 고발하려 했다면 수십 장의 글이 필요했을 것이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 다른 소통의 언어인 그림으로 회화적 비평을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신윤복, 김홍도 같은 풍속화가들이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그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한자를 몰라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민중들이, 백성들이, 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언어가 혼잡하게 된 계기가 나옵니다. 인간의 교만 때문에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하나님과 어깨를 견주려고 높이 탑을 쌓았던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내 진심이 전달되고 있는지, 나는 타인의 진심을 대화를 통해서 듣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겸손과 소통 역량을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시날 평지에 모인 자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2)

여기서 '그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그들'은 누구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노아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셈의 후손, 함의 후손, 야벳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면 이 시날 평지는 그 당시 누가 다스리는 곳이었을까요?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9-10)

그의 나라, 그의 왕국이 시날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니므롯이 큰 왕국과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함의 후손과 셈의 후손과 야벳의 후손이 함께 모였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은 구스와 니므롯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삶을 살았지만, 셈의 후손과 야벳의 후손은 비교적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며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들 모두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니므롯처럼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자신의 나라를 자랑하고, 하나님 없이 힘을 권력으로 삼는 자, 그들의 휘하에 노아의 모든 후손들이 함께 모여 버린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진노케 한 두 가지 결의

그런데 그들이 시날 땅에 모여서 한 가지 중요한 의견을 통일합니다. 의기투합을 한 것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3-4)

이들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결의를 합니다. 그 두 가지 결의가 모두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결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첫 번째가 '우리 이름을 내자'이고, 두 번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에서 '이름'은 히브리어로 '쉠'(שֵׁם)입니다. '쉠'은 곧 '명성'이라는 뜻입니다. 명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홍수 이전의 가인의 후손들이 용사가 되어 고대의 명성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이름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홍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다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다. 무엇으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까? 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에까지 도달하게 하여 하나님과 어깨를 견주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오는 동안 인간의 교만이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교만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교만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뱀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 말에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선악과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아지기는커녕 그들은 그만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