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o의 이 글을 보고 예전에 썼던 글들이 떠올랐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다시 옮겨와보려함.
글을 쓰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건 그래서다. 시도때도 없이 자신과 대화를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진짜 사랑은 불가능한 초인을 가정하고 나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얼마나 가냘프고 여린 사람인지를 깨달을 때 드러난다. 자신의 약함을 인지함으로써 우리의 나아감은 높은 자존감으로 치환된다. 공포가 없는 곳엔 용기도 없다.
(2023.04 글 中)
나는 종종 ‘초인’을 상정하고, 그 초인을 동경하며 살아왔음. 완벽한 하루를 보내지 못하면 내 손에 든 채찍을 자비 없이 휘둘러 말그대로 나를 반죽여 놓았다. 나의 하루엔 만족점이 너무도 높았다. 그래서인지, “만족할 만한 하루”를 보내도 그리 기쁘지 않았음. 다음 날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가 동경하는 초인들은 ‘끄떡 없이’ 이런 걸 행할 거라고 믿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그 길을 묵묵히 걸었음.
“고행”을 하고 있었던 거임.
나의 생산성에 대한 점검과 메타인지가 ‘내 자아’와 결부될 때 나는 더이상 생산성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내가 저조한 생산성을 보인 날은 곧 자기 비난으로 이어졌기 때문. 내가 좋아하는 뇌과학 책에 이런 문장이 있음.
오류 경보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류를 피하게 만들고, 심상을 수정하지 못하게 한다. 뇌는 자아를 지키려고 한다. 오류 경보는 당신의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심상을 수정해주는 고마운 것이며, 그것 덕에 인간은 더 성장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의 문장을 사용하여, 2021)
나는 깨달았음.
어쩌면 내가 단순히
“자기반성이라는 편리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건 아닐까?
‘반성했잖아. 날 흠씬 혼내줬잖아. 한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