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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핀탄 오툴: 피터와 아이번이라는 두 형제의 관계가 신작 소설 <인터메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관계는 카인과 아벨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적 차원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언제쯤 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샐리 루니: 피터와 아이번에 대해 쓰기 시작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이 책의 아이디어는 체스 동시 대국을 상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그랜드 마스터급의 실력 있는 체스 선수가 여러 명의 선수들과 동시에 겨루는 경기, 그런 경기가 아일랜드 서부 작은 마을의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거기서 일하는 한 여성이 젊은 남자(아이번)의 체스 경기를 지켜보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 아이디어가 정말 매혹적이었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썼고, 그러고 나니 다른 등장인물들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서로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들에 대해서 꽤 많이 썼는데, 어느 순간 막히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아이번에게 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소설을 써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피터가 그림을 완성해준 셈이었고, 그 순간부터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Q. 이 작품에서 우리가 빠르게 마주하게 되는 지배적인 감정은 슬픔입니다. 작가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죠. 슬픔이라는 감정이 다른 감정보다 더 붙잡기 어려운 이유는 압도적이면서도 그것이 등장인물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풀어내기가 힘든 감정이기 때문일까요?
이 책의 제사 “지금 슬픔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체스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체스는 두고 있거나 두고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슬픔은 매우 복잡하죠. 삶이라는 직조 속에 늘 존재하며 그 순간순간을 포착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느끼는 슬픔이 무엇인지, 삶 속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씁니다. 아이번에게 형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들이 부모를 잃은 슬픔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폭력적일 만큼의 분노가 폭발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망의 단계로요.
죽음은 삶 속에 존재하기에 등장합니다. 죽음이란 항상 드리워진 질문이죠. 아마도 등장인물들이 나이를 먹고 저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 질문들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을 넘어 그들에게 더 생생하게 체감되는 것이 되었을 겁니다. 결국 작가로서 삶에 대해 쓰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삶이 소중해진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Q. 당신의 작품을 떠올리면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라는 표현이 생각납니다.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는데, 정작 가부장은 존재하지 않죠. 당신의 소설 속에서는 아버지들이 부재합니다. 이런 긴장은 작품 전반을 관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던 물려받은 삶의 형식들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비어 있거나 사라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렇다고 느껴요. 자본주의 체제를 포함해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에 압력을 가하는 사회 구조들이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부장제를 비롯해, 그에 대한 합의된 믿음이 이미 소진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여러 사회적 형식들과 씨름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가고 싶지만, 아직 완전히 초월할 수 없는 사회적·문화적 국면 속에 갇혀 있습니다. 소설가로서 제가 관심을 갖는 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런 상황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살아간다는 일에 어떤 압력을 가하는지요. 저는 그런 투쟁과 갇혀 있다는 감각이 제 모든 작품 속에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런 사회적 형식 중 하나가 소설 그 자체인가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점은 18세기에 등장한 이 형식이 어떻게 여전히 기능하는지 당신이 작품 속에서 씨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소설 형식에 정말 집착하는 편입니다. 소설은 산업 자본주의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등장한 부르주아 형식입니다. 소설은 자본주의의 폭발과 그에 수반된 새로운 사회 구조와 결부된 새로운 유형의 개인주의―다시 말해 새로운 인간 심리―에 목소리를 부여했죠. 어떤 의미에서 개인은 그 경제 구조와 함께, 그리고 소설 형식과 함께 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역사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 체제 속 개인의 심리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은 여전히 부르주아적 형식이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일까요? 18세기 소설이라는 의상을 걸쳐놓고, 등장인물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게 하면서 현대적 이야기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소설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 증거 가운데 하나는, 순진하게 들리지 않길 바랍니다만, 사람들이 여전히 소설을 읽는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고갈된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황금 잔> <율리시스>를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출간되는 소설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져온 극심한 변화 속에서 주체성을 수용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