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주다 (창9:18-23)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아닙니다. 바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그분은 1926년생으로 95세입니다. 27세 되던 해인 1953년에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올라 오랜 세월 그 위치를 지켜왔습니다. 단순히 영국 여왕이기 때문에, 지위 때문에 영국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존경받을 만하고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이 되기 전 공주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영국군의 일원으로 자원입대해서 수송병으로, 운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적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장차 여왕이 될 분이 트럭을 몰고 수송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국 국민들에게는 큰 감동이요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친히 실천하는 여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여왕은 여왕이 된 이후에 사소한 잘못과 사소한 허물은 덮어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여왕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일이 있습니다. 회담을 마치고 백악관 뜰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188센티미터이고 여왕의 키가 163센티미터입니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연단 두 개를 따로 준비해서 두 분의 키 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를 놓쳤습니다. 하나의 연단에서 먼저 부시 대통령이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왕이 연설을 하는데, 키높이 연단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마이크가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영국인들은 분노했으나 여왕은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내려왔습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이었습니다. 연설 이후에 대통령과 백악관이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왕이 사는 윈저 궁에 중국 고위관료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식사 이후에 디저트를 먹을 때 과일을 만지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핑거볼이라는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 줍니다. 이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손을 씻는 물입니다. 그런데 중국 관리가 이를 모르고 그만 마셔버렸습니다. 여왕이 보고 있다가 따라서 핑거볼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좌중들, 배석한 사람들도 함께 핑거볼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뒤늦게 여왕의 진심을 알게된 중국 관리가 자기가 배려받고 대접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하여 깊은 감사를 전했습니다.

이런 여왕을 영국 국민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의 세계는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사소한 실수로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뜯는 통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도 그 사람의 정치적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이 악한 정치 바닥에서 여왕이 보여준 품격은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들추어내는 사람이 있고 덮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보면 노아의 잘못을 대하는 아들들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나옵니다. 함은 들추어내는 사람이고, 셈과 야벳은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함의 길에 서 있는지 셈과 야벳의 길에 서 있는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의 길을 따라가야 할지를 함께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영적 긴장을 놓친 노아

먼저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홍수가 지나갔습니다.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열심히 자손을 낳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제는 생육, 번성, 충만의 말씀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입니다.

노아도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홍수 이전에는 방주를 120년 동안 짓느라 먹고 살기에,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습니다. 포도 농사 정도는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홍수가 다 끝나고 삶의 여유가 찾아옵니다. 농사뿐만 아니라 목축도 하고 포도 농사도 지어서 삶의 여백을 채워가는 중입니다. 이토록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이토록 평안한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노아에게도 이제는 태평성대의 세월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우리가 볼 때 깜짝 놀랄 만한, 이 사람이 노아가 맞나 할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원래 이런 사람이 술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 있으면 이상할 것도 아닙니다. 원래 그랬으니까, 항상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노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충격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예배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노아 단 한 사람만 예배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히 동행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하신 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준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노아가 이렇게 술에 취해서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어서 벌거벗고 누워 있는 이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노아가 이렇게 된 이유는 영적인 긴장감을 한순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치면 영적인 예민함이 떨어지고, 영적 예민함이 떨어지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무뎌집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엄청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노아 한 사람하고만 소통하셨습니다. 이유는 노아가 영적으로 예민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제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수 심판도 끝나고 두 번째 창조가 이루어지고 이제는 먹고 살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은 그만 한순간 영적 긴장을 놓치는 순간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보여주지 말아야 될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자기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만 것입니다.

1-1. 다윗의 실패

이것은 노아만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위인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속한 그의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니라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전쟁해야 될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국지전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전쟁터로 가지 않고 왕궁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이 아마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이 정도는 제가 가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 옛날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의 왕이 아니고, 유다 지파 한 지파의 왕이 아니고 통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왕이 이런 정도의 일에는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그냥 여기에 머물러 계십시오."

이 말에 다윗은 그만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목자 정체성을 가진 왕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앞장서서 그 일을 진행하는 사람입니다. 양들은 전쟁터로 몰아놓고 자기는 왕궁에서 편안하게 지내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전쟁하고 있는데,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는 한숨 늘어지게 자고 저녁이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해가 떨어진 이후에 일어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습니다. 저 길 건너편에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태만과 게으름으로부터 안목의 정욕이 찾아왔습니다.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간음 죄를 범합니다. 간음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까지 했습니다. 한순간 그의 긴장이 무너지는 그 순간 그는 간음한 사람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고,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한 십계명의 계명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열 가지 십계명 중에 순식간에 세 가지나 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음한 사람, 살인한 사람,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한 사람. 순식간에 찾아온 범죄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어찌 우리가 다윗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시편 23편의 저자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 73편이나 남긴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광야의 영성을 붙들고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고 사울의 생명을 존중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순간 정욕에 눈멀어서 간음한 사람,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