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드라마(<신삼국>)를 다 봤다.

드라마 초반에는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 요소가 많아서 킬킬 거리며 봤다. 누가 가장 바보인지, 바보 중 누가 그나마 욕망에 솔직한지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가장 욕망에 솔직한 바보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천팔백년 전에 태어난 사람에게 인간적인 동질감을 느끼면서 속으로 "지지마라!"고 외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대체로 조조와 사마의에게 감동했다).

하여간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사나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사나이들이 사나이의 고전, [삼국지연의]로부터 얻는 자긍심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95화나 되는 드라마를 봤는데 그럼에도 잘 모르겠다. 유비 삼형제는 사나이다운가? 세 사람 중 누구도 명예롭게 죽지 못했고, 불운이 아니라 명백히 자신의 결함으로 파국을 맞았다. 무엇보다 누구도 도원결의의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도원결의 라는 성어는 사전에 나와있는 것처럼 '의형제를 맺음을 뜻하'는 말로 쓰일 게 아니라 한낱 말에 지나지 않는 부질 없는 맹세를 뜻하는 말로 더 적합하지 않은가.

서기 180년에도 21세기에도 사람들은 '계집같다'는 표현을 모욕으로 쓴다. 제갈량은 전쟁을 피하는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부인의 옷을 보냈다. 그걸 본 사마의의 부하들이 세상에 이런 치욕은 또 없다는 듯이 펄쩍 뛰는 걸 보고 자기 부모를 욕해도 저러진 않겠다 싶었다. 삼국지의 세계에서 여자란 것은 대충 이런 의미이다.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영어의 쓰임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삼국지연의]에는 여자가 거의 안 나온다. 그런데 재밌는 건 <신삼국>의 세계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여자들은 배포와 지략과 인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주유는 제갈량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암살을 지시하는데, 주유의 아내 소교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제갈량을 구해준다(주유와 제갈량은 아군이었으며 주유는 제갈량에게 목숨을 빚진 적도 있다). 그러자 주유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소교를 버린다. 유비의 아내는 나라를 구하려고 서른살 많은 유비와 결혼하지만, 그 바람에 데릴사위가 된 유비는 적의 계략대로 대업을 잊고 주색에 빠진다. 초선과 그 애비인 왕윤을 비교하면 또 어떤가. 누가 소인배고 누가 대인배인가?

삼국지의 남자들은 툭하면 삐지고 이간질하고 가식적이고 비열하다. 남자가 대업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들 한다. 유비가 제갈량만 예뻐하니까 관우와 장비가 빈정상해서 저지른 짓들도 대업의 일부일까? 속 좁고 인정욕구가 지나친 것 뿐이다. 남자만 그런 게 아니라 평범한 인간은 대개 좀스럽고 어리석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십대 여자 청소년들도 다르지 않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주인공들도 삐지고 이간질하길 좋아하며 가식적이고 비열한 데가 있다. 그런데 "한날 한시에 죽자"는 맹세를 저버리고 각자 따로 죽은 남자들은 '도원결의를 맺은 영웅'으로 기억된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는 "하여간 여자들이란~"같은 리뷰가 달린다. 사람들은 남자들의 우정을 과대평가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가끔 남자들의 배신까지도 과대평가하고 싶어한다. <신세계>를 보고 수컷들의 비정한 먹이사슬이 어쩌구... 크으... 하며 감탄한다. 또는 <아수라>의 "못난 수컷들"을 보고 귀여워서 미치려고 한다. 박근혜 퇴진의 단초가 된 이화여대 시위를 두고는 뭐라고 했을까?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다.”

드라마 <신삼국>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모욕은 '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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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들이 사나이의 고전 [삼국지연의]로부터 얻는 자긍심이 뭔지 궁금해서 95화나 되는 드라마를 봤고, 알게 된 것은 도원결의가 그다지 명예로운 맹세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나이라는 말의 의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의 남자' 이상인 남자란 도대체 뭔가. 나는 계집이라는 말이 언제나 불쾌했다. 사나이들은 사나이라는 말이 명예롭다고 느낄까?

20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