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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공동체 전체의 문해력을 높여주는 사람은 본인도 말을 잘하지만 타인의 말을 아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뛰어난 연사보다도 뛰어난 경청자가 많아질 때, 사회는 더 나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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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어의 빈곤’ 혹은 ‘문해력의 위기’를 느끼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본인이 ‘새로운 배움’에 관심 없을 때다. 문해력이 늘어날 때는 ‘배움의 의지’가 충만할 때다. 나의 어린 조카는 나를 만날 때마다 10개가 넘는 단어들을 물어온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잘 듣고 있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질문한다. 나는 조카에게 ‘화려하다’와 ‘초라하다’의 차이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옥스퍼드대학’이 어떤 곳인지도, ‘유학’이 무엇인지도 알려주며 기뻐한다. 조카와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단어를 배우는 일도 재미있지만 가르쳐주는 일도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어휘력이 아직도 부족해서 더 멋지게 풀이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조카 몰래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내 모습도 떠오른다. 그때는 어른들이 잘 설명해주지 않아서 답답했는데,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을 때는 책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항상 책에 코를 박고 있는, 행복한 책벌레’가 되었다. 그런 내가 좋았다. 이 유튜브와 게임 천국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책을 읽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이 거친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는 최고의 비결이다. 내 문해력의 9할 이상은 항상 이야기가 있는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어린 시절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할 사람이 없을 때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기쁨’을 안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아, 우리 준우가 힘들었구나”라고 그 아이의 감정을 받아쓰기하듯 그대로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힘을 낸다. 내 느낌에 거울처럼 공감해주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공동체 입장에서는 ‘얼마나 민의가 정책에 반영되는지’가 중요하다. 민생을 말로만 외치면서 국민의 고통과 분노에 관심이 없는 정치인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상처받았는가. 개인의 문해력은 ‘가까운 타인의 경청’이 있을 때 늘어나고, 공동체의 문해력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늘어나게 된다. 개개인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과 의지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공동체의 문해력은 물론 사회 전체의 행복 지수도 올라간다.

셋째, 심리적으로 고립과 절망, 우울을 느낄 때다. 언어의 빈곤을 느끼는 가장 힘겨운 순간이 바로 이럴 때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불행할 때 문해력을 시험당한다.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불행을 느낄 때, 문해력은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가 문해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때 싱그러운 언어의 새순이 돋던 자리에 다 타버린 나무 밑동의 재만 남은 느낌에 괴로운 적이 많았다. 내가 알던 모든 언어가 힘없이 무너지는 느낌.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나는 그런 절망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절망에 빠질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좋은 독자’로서 더 많은 글을 읽고, ‘좋은 작가’로서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분투했다. 돌이켜보면 문해력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는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언어의 빈곤’, 혹은 ‘문해력 빈곤’의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첫째, 우리는 ‘매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며, 둘째, 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타인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셋째, 절망이나 고립에 빠지지 않도록 매 순간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더 나은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스스로 삶을 바꿔야 한다. 나는 이 세 가지 ‘언어의 빈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매일 배우고, 쓰고, 열심히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방 안에서 휴대폰이나 컴퓨터만 붙잡고 있을 때는 결코 문해력의 빈곤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 슬프고 비참한 언어의 빈곤, 강자들의 화려한 증오의 언어가 약자들의 소박한 사랑의 언어를 부수고 짓이기는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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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말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도록, 가끔은 ‘쓰라리고 참담한 언어의 늪’ 한복판에 들어가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올해 초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집회에 나갔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거리 한복판에서 죽어갔는데, 책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2차 가해, 3차 가해를 일삼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영원히 잃어버린 유가족의 손을 붙잡아주는 사람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참사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 유가족들에게 그야말로 ‘독설’을 넘어 ‘망발’을 쏟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불온한 세력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고, 안 그래도 고통의 늪에 빠져 있는 유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