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3 -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의 고난 (벧전 3장)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오늘은 베드로전서 세 번째 말씀으로, 주제는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의 고난'입니다.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면 분명한 연관성이 드러납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리는 성도들이 고난받고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가정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며, 세상에서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1. 성도의 가정생활

1-1. 아내에게 주는 권면

베드로는 아내의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절을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지시어가 나오면 앞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와 같이'라는 말이 무엇과 같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베드로전서 2장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왕이 좋아서 혹은 이 나라가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믿는 백성으로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정생활을 얘기할 때도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혼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 안에 결혼도 하나의 제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아 결혼 제도 안에서"라는 뜻이고, 그 제도 안에서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일단 아내들이 기분 나빠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하다'라는 말의 원어는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인데, 이것은 '자발적으로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말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기 싫은데 시키니까 내 자유 의지를 억누르고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는 시키기 전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 알아서 밥 차려 먹으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굉장히 조직적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일단 성도가 아닌 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성도라도 가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냥 무늬만 성도인 사람은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삽니다. 그런 남편이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구원 때문입니다. 이 남자의 영혼이 불쌍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시댁과의 관계도 있고 여러 가지 관계들이 있는데, 이 제도 안에서 시키기 전에 자발적으로 아내는 자기 할 일을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 때문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보니까 "말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늬만 성도인 남편 혹은 교회라면 정말 싫어하는 남편, 그런 남편과 말싸움을 해서 말로 이겨서 전도해 보셨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안 됩니다. 말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좋은 교회여야 하는데, 언론에 나오는 것, 신문에 나오는 교회, 어디서 듣고 온 이야기를 보면 성도인 우리가 봐도 도대체 교회가 왜 저런지, 목사들이 왜 저런지 한탄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에 부정적인 내 남편에게 말로 아무리 해본들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입니다. 그 행실이 남편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은 다 양보해도 됩니다. 구원 하나가 본질입니다. 내 남편의 영혼 구원이라는 이 하나가 본질이고 나머지는 전부 비본질입니다. 내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존심을 좀 숙이고, 속상한 것 좀 접어주고, 그냥 행실로 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중요합니다. 2절에 "너희의 두려워하며"라고 했는데,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까? 잘못 읽으면 남편에게 매 맞을까 봐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베오(φοβέω)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보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말로 하지 않고 행실로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 자발적으로 행하는 이유는 누구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판에 남편이 뭐가 두렵습니까? 시댁 식구가 뭐가 두렵습니까? 겁날 것 하나도 없는데, 왜 내 남편 영혼 구원 못하면 이게 하나님 앞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라고 했는데, 남편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남편에게 잘하는 것을 남편이 알고, 또 정결한 행실, 곧 바른 행실을 봅니다. 그러니 불신자 남편이나 무늬만 성도인 남편은 듣는 존재가 아니고 보는 존재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보는 존재입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들어야 하는 존재이고, 성도 이전의 사람들은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내 행실을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얘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아내는 나중 믿은 남편이나 아직 불신자인 남편에게 영혼 구원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아내는 어디에 신경을 더 써야 합니까? 3절을 보면 여자분들이 좋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단장은"이라고 했는데, 이 '단장'이라는 말이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코스모스는 우주, 질서라는 뜻인데, '코스메틱(cosmetic)', 곧 화장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화장품을 바르는 것은, 너희가 외모를 꾸미는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뒤에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셨을 겁니다. 성경 말씀에 금목걸이도 차고 금반지도 차고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단장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이라고 했는데, 마음에 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의 또 다른 자아, 인격입니다. 내 인격, 진짜 인격, 나의 신앙 인격을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인격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썩지 아니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공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여기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 즉 너희의 인격을 온유하고 안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화장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으로 단장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내면의 인격을 단장하라고 합니다. 아내들이 이것을 더 신경 쓰라는 뜻입니다.

잠언 31장 30절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라고 했습니다. 곱고 아름다운 것이 왜 거짓되고 헛됩니까?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영원합니까? 그냥 순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되고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내들에게 요구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장 중요한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순종하라, 자발적으로 행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으로 너희를 화장하라, 말씀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단장하라는 말을 각자가 자신에게 맞게 적용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씀으로 따박따박 남편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들어가면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입력은 말씀을 내가 들어서 나에게 입력되는데, 나오는 것은 행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못 배운 사람들은 들어온 그대로 뱉어냅니다. 오늘 여기서 공부했으면 이것이 행실로 나와야 하는데, 집에 가서 입으로 나옵니다. 남편이 텔레비전 보는데 텔레비전 끄고 앉아보라고 해서 입으로 나오면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귀찮고 짜증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신앙 인격을 화장하는 방법입니다. 나를 화장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들, 불신자들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항상 말씀을 먹었으면 그것을 삶으로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1-2. 남편에게 주는 권면

이제 부인들에게만 이렇게 하면 억울하니까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7절을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와 같이'가 나옵니다. 아까 아내들에게도 '이와 같이'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라는 뜻이었습니다. 결혼 제도를 충실히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는데,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첫째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어떤 지식입니까?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어떤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까?

첫째, 남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곧 결혼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나이가 되었으니까, 집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라고 하니까 그냥 내 눈에 좋은 사람 데리고 와서 결혼하고 살면 중간에 얼마나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까?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식을 따라 동거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의 원리를 이미 성경 말씀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기본적인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에덴에서 창설하셨습니다. 한 남자 한 여자, 창세기 2장 22절에서 25절까지 보면 결혼의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