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오늘은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세 번째 시간으로, 3장을 함께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3장을 공부하면서 2장을 잊어버리고 오시면 곤란합니다. 1장과 2장에 어떤 핵심적인 내용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되새기고 오시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2장에서 우리가 공부했던 핵심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그냥 한 사람의 성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방식을 설명했는데, 권면했고 위로했고 경계했습니다. 즉 다양한 방식으로 세우고 또 키워갔는데, 그 '경계했다'는 말은 책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을 키우고 세워갈 때 중요한 것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2장을 통해서 배웠던 바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교회는 사람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우고 키워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키워내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3장의 이야기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뒤편에 가면 본격적으로 기쁨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성도는 언제 기쁜가? 우리가 언제 기쁩니까? 놀 때 기쁜가? 돈을 벌 때 기쁜가? 내가 드리는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기쁜가? 사람들이 다 기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성도가 기쁠 때가 언제인가?
이 이야기를 오늘 보고 나서 '나는 정말 이 기쁨을 누려본 경험이 있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여러 번 무산된 바울은 누구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하려고 했는데 사탄이 자꾸 막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이 본인이 가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자꾸 차단되고 막히니까 그중에 디모데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지금 2차 선교 여행을 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하는데, 2차 선교 여행은 유럽 지역이었고, 유럽의 북쪽이 마게도냐였고, 마게도냐의 첫 번째 성이 빌립보, 두 번째가 데살로니가, 세 번째가 베뢰아였습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테네를 지나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합류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세 분의 개척 멤버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였습니다. 그러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데살로니가의 경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인데,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기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남아있고 디모데를 파송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디모데를 지칭하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이 절에서 디모데를 어떻게 지칭합니까? 첫째는 '우리 형제'라고 그랬습니다.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그랬습니다.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수직적인 단어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길러낸', '내가 키워낸', '내가 이 친구를 루스드라에서 픽업해서 지금까지 보고 맡아서 잘 키우고 내 말을 잘 듣는' 이런 말이 있습니까? 여기 없습니다. '형제', '우리 형제요',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대단히 수평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이 세 분 사이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바울 시절의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주종 관계가 확실하지 않습니까? 주인과 종이 확실하고, 선생과 제자가 확실하고, 그리고 왕과 백성이 확실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보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수평적인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에서 제자들의 입이 예수님 앞에서 다물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있는지 복음서를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수난 예고를 하시니까 베드로가 "주님, 결코 이런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끼리 막 싸웁니다. 누가 크냐 다투기도 하고 싸우고, 그리고 예수님께도 묻습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도 묻고, "예수님, 저희들은 아내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다 버렸는데 천국에서 상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도 묻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것을 보면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반성을 하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역자들하고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부드럽지는 않더라고요. 편하게 이야기를 잘 안 해요. 그것을 보면 수직적인 리더십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수평적입니다.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벽들이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수직적인 '올라간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라간다'는 개념, 그것이 어떤 개념입니까? 자꾸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까? 뭘 어디로 올라가고 싶으십니까? 장로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닌 척하시는데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권사 되고 싶고 장로 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자기 암시를 스스로 주는 것이고, 교회도 계속 그것을 가지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지속적으로요. 그런데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버리면, 모든 것이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그런 부조리와 부작용들은 상당 부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디모데가 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입니다. '굳건하게 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리조(στηρίζω)라고 되어 있고, '훈련시켜 굳게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잠깐 얼굴 보고 밥 먹고 "잘 있었네" 하며 사진 찍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훈련시켜서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도 전하고 훈련도 시키고 그 성도들을 만나고 위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