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동인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대한민국 소설계를 대표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1932년에 발표되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작중 화자 역할을 하는 사람은 의사이고, 그의 오랜 친구는 서른 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20대 시절은 아주 방탕했습니다. 사창가를 드나들었고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성병을 얻었고, 그 때문에 남자로서의 생식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 사람은 의사 친구를 두었지만, 의사 친구인 작중 화자도 그를 돕지 못해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친구가 아무도 모르게 결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의사인 화자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내 될 사람에게 알렸을까? 비밀로 했을까? 그러나 자기 일이 아니니 섣불리 나설 수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참 시간이 지나서 더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친구의 아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 짐작이 되었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친구가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것도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아이 얼굴을 보라고 말하며, 이 아이가 자기 증조부를 쏙 빼닮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양말을 벗습니다. 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강보를 펼치고, 아이의 가운데 발가락과 자신의 가운데 발가락이 너무 똑같이 닮지 않았느냐고 동의를 구합니다. 그러자 의사인 화자는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자네 발가락뿐 아니라 이 아이가 자네 얼굴까지 쏙 빼닮았네." 그렇게 말해서 친구를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깨닫습니다. 닮은꼴을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보면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닮아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또 그분들의 부모님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로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납니다. 아담은 누구를 닮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고, 이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을 닮아서 이 땅에 지음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장면입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방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설계하셨을 때 이런 모습으로 살라고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제대로 다시 살펴보고,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대로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말씀하시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과 세계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땅에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권자로 계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음에 생각해봐야 할 것은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형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상은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면, 하나님의 겉모습이 우리 속에 혹은 우리 외면 속에 그대로 있다는 말일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에도 보면 형상을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 주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형상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을 읽어보면 '첼렘'(צֶלֶם)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영어 성경은 'imag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외적인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 따른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본성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만약 태초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태초에 지으신 인간 아담을 만나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을 본다면,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아담에게서 하나님 당신의 본 모습, 그것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의 형상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거듭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듭났다, 회복되었다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회복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과연 거듭난 존재라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그 모습이 회복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차례대로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창조의 주권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성을 일컫는 단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혹은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본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은 어떤 단어입니까? 사랑은 그 자체로 보면 추상명사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활동할 때, 드러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베풀고, 나누고, 섬겨 주고, 사랑의 수고로움이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날 때, 사랑은 비로소 가치 있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너를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그런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 보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주권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저 사람은 참 차가운 사람이야", "저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인생을 하나님의 주권대로, 창조의 섭리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사랑을 느끼게끔 만들어 줘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받은 존재라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이 드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특징짓는 단어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대표하는 한 가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종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 보좌, 저 높고 높은 아름다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예수님께서는 이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셔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는데, 그 가운데 공생애 3년의 기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시간들이었습니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순종이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할 때, 우리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의 뜻을 꺾으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뜻과 내 생각과 나의 의지와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그때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나의 의지를 전적으로 꺾고 그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의 주권대로, 창조의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하고 싶은 것이고, 말씀 따로 내 생각 따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창조 섭리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