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Lord S 구동 종료 기념글, 무는뱀으로부터.
사실 A.(@Astanonymous, @astanonymous.bsky.social)와 Lord S(@astarion-szarr.bsky.social)가 함께 떠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지 생각했을 때 제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A.의 1주년을 축하했을 때 썼던 것처럼 이런저런 소회를 쓰든지, 아니면 단편 소설을 쓰든지. 그야 산문을 쓰고 싶긴 했지만 너무 솔직하게 쓰게 되는 것 같아 부끄러워 망설였지요. 그런데 며칠 동안 단편을 잡고 있어도 이야기가 안 나오는 걸 보니까 이번엔 산문으로 두 사람을 보내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A.의 여행에 너무 늦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말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 하면... 아무래도 작년 8월부터의 설레는 저녁 시간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저녁 여섯 시부터 열한 시 반, 혹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레스토랑에서 서버 일을 했습니다. 제가 외국에 살고 있고, 한국보다 7시간에서 8시간 정도 느리게 시간이 가니까 사실 그 때면 한국은 벌써 새벽 한 시, 두 시쯤입니다. 타임라인이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달려가다가 천천히 잦아드는 때죠. 다들 자러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 일하고 있으면 진동 알림이 톡 톡 떴습니다. A.가 왔다는 소리죠.
저는 꽤 성실하고 일을 잘하는 직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마 바로 그 트윗을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일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레스토랑은 저녁 7시부터 개점이기 때문에 트위터를 볼 시간이 없지요. 그러니까 그 알림의 감각만으로 아, 와서 뭔가 말하고 있구나, 하면서 일을 하는 겁니다. 달콤하고 달콤한 행복과 행운의 감각입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혼자서 스물여섯 개, 스물일곱 개 테이블을 보면서 설거지까지 다 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갈 무렵이 되면 그때서부터는 휴대전화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집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화면만 봤습니다. 그럼 SNS 안에서 창백한 뱀파이어 스폰이 남몰래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죠. 보이는 모든 트윗을 확인했다고 도장 찍는 것처럼 하트를 누르고, 또 끼어들고 싶어지면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화젯거리에 말을 보태는 그 시간이 꿈처럼 이어졌습니다. 이윽고 이쪽의 새벽녘이 되면-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8시, 9시쯤 됩니다-정말 뱀파이어 스폰이 졸려서 자러 가는 것같이 A.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제야 저도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누워서 A.의 지난 트윗들을 보다가 잠에 들었지요. 저는 투잡 같은 걸 하고 있어서 내일도 나가야 하니까요.
그렇게 한국에 있는 그 어떤 친한 사람도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없는 그 깊은 밤의 시간을 함께 지새워준 누군가가 있다는 게 가끔 얼마나 행운으로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아는 창백한 누군가가 골똘히 생각하며 뭔가를 낡은 수첩에 적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는지, 그 섬세한 말과 해석과 수많은 이야기를 얼마나 밤새워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시간 동안 다 기억해 내는 게 어려울 만큼 너무 많은 말들을 봤고 또 나누어서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고 해도 꼽기가 어려울 정도군요. 제게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과 함께 언젠가 밤에 먼 별을 헤듯이 계속 자기 자신을 찾아서 적어 내려갔던 아주 다정하고 친절하며 연약하면서도 강인했던 친구로 남을 거 같습니다.
반면에 Lord S(이하 로드)와의 기억은 조금 우스운 것들부터 시작합니다. 제대로 얘기하기 시작한 때에 저는 애완 뱀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전에 타브 봇계로 한 번 말을 걸었을 때, 아무래도 선한 위저드이자 비승천 아스타리온의 연인인 인물로서 말을 이어 나가기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이따금 안쪽이 꼬인 사람들은 동물을 인간보다 더 애호하기도 하는데, 로드는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나름의 묘수를 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음엔 그냥 재밌게 놀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엔 우겨서 친구까지 되어있더군요. 자르 성의 폭군 앞에서 울고, 소리 지르고, 또 헛소리를 해대고, 그의 간식을 훔쳐 먹으면서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이름도 개성도 가지각색인 스무 마리 고양이들 사이를 신나게 누비고 다니면서 밥이나 받아먹고, 벽난로 앞에 늘어져서 잠이나 자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차가운 친구와 따뜻한 친구 사이에서 둘의 베스트 프렌드를 자처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드가 늘 다정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승천한 아스타리온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짜증을 내고, 굉장히 난폭하게 굴고, 때로는 아주 어두운 모습들도 전부 보여주죠. 그런 이야기들도 뱀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게 굉장한 행운 같습니다. 물론 뱀이기 때문에 그런 주제에 정면 돌파를 해 대화한 게 아니라 문제의 표면을 슬슬 기어간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볼 수 있었던 로드의 모습도 분명히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화가 나 있고, 슬퍼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영원히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제가 사랑하는 아스타리온의 한 모습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사이에 로드는 몇 번이고 뱀에게 영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래도 그 뱀은 너무나 건방지고 바보 같아서 그게 뭔지 이해를 못 해 매우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 뱀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주 오래, 오래 산다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로드는 건방진 애완 뱀을 아주 오랫동안 귀여워할 수 있었을 거로 생각해 봅니다. 세월이 흘러서 고양이도 몇몇 사라지거나 더해지고, 시종장도 바뀌었는데 여전한 뱀과 로드가 서로 헛소리를 해댈 걸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재미있는 것은 로드와 이야기한 시간은 언제나 제게 있어서 낮이었다는 것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승천한 아스타리온이 낮에, 비승천한 아스타리온이 밤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채워졌던 낮과 밤의 시간이 일상을 버티게 해주었고, 삶에 자연히 따라오는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들도 잠시나마 그 감정들과 조금 먼 곳, 예상치 못한 기쁨이 있는 곳에서 관조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제게 귀한 즐거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도 제게 있어서 또 하나의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있어 달라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분명 흔치 않은 기회겠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반쯤 울적하게 어두운 산문과 겨우 나온 반쯤 밝은 단편소설을 엮어서 오래된 낮과 밤들을 잘 보내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