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aPMOSdmlhg?si=lbV6MNN5ew26E7Eh

                                                                               연속권장

이반 래빗은 깨어날 때 부터 이반 래빗이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석조 건물 안에서 눈을 뜬 그는 처음에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꽤 거친 난투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인식되자, 피가 썩는 냄새와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비위가 안 좋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지만 지친 탓인지 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깝게. 그는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의문스러웠다. 이상한 각도로 뻗어있는 허리와 다리를 무시하고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한번 둘러본 그의 손에 뭔가 닿았다. 금속 비슷한 재질로 되어있는 카드였다. 피투성이였지만 옷으로 대충 닦고 보니 이름과 함께 직책이 새겨져 있었다.

Ivan Leavitt.

D구역 Y교회 소속.

웃긴 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장소의 심각성도 잊은 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는 이 카드의 주인을 찾아 바닥을 둘러보았다. 와. 저거 머리에 말뚝이 박힌 거야?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에 있는 시체를 오래 보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벌린 입안의 송곳니가 날카롭다. 그 옆에 바닥을 보고 엎드려 있는 시체는 심장이 있을 위치의 뒤에서부터 말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쇠막대기가 박혔다. 소름이 돋으면서도 웃겼다. ****흡혈귀들이 따로 없군그래.

그의 뒤쪽에는 사제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죽어있었다. 출혈량으로 보았을 때 내부 장기가 성하지 않았던 듯하다. 발치에 가방이 떨어져 있고, 그 입구 틈새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와 같은 형태의 카드가 보였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몸을 끌면서 카드를 주워 확인했다. 크리스라고 하는군. 이름을 보아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럼 나는 이반 래빗인가? 그가 쉽게 수긍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같은 교회 소속인 크리스의 처참한 꼴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니지, 아깝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뭐가 아깝다는 거지? 그는 드디어 본인의 내면이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물기 어린 것을 씹어 삼키고 싶다. 그것이 빵은 아닐 것 같고, 딱히 풀도 아닌 것 같고. 그러면 그런 음식이 있었던가? 물기 어린 무언가…를 생각하니 급격하게 목이 말라왔다. 썩지만 않았어도 피를 빨아 마셔서 제 안에 가득 채웠을 텐데. 이반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한쪽이 유난히 뻣뻣했다. 손을 확인하니 살짝 살점이 묻어 나왔다. 목을 꽤 심하게 물어뜯겼나 보다. 그런데도 움직이는 데에 아무런 고통 없을 정도로 고쳐져 있었다. 뻣뻣한 것은 독이 도는 탓일까. 이반 래빗은 아무런 기억이 없었기에 본인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흡혈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흡혈귀임을 숨기고 교회에 다닐 수 없었을 텐데. 보아하니 흡혈귀 같은 것들과 싸우는 직책이었던 것 같고. 그는 바닥에 흩어진 여러 기구를 살펴본다. 딱히 눈에 익는 것은 없다. 송곳이라든가 칼이라든가, 살벌한 도구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소꿉놀이나 친목회를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는 석조 건물을 찬찬히 살펴본다. 벽에 걸린, 연식이 가늠도 되지 않는 램프가 죄 꺼져 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인지, 이곳은 아무래도 자신들이 소속되었던 교회 건물은 아닌 것 같았다. 몸을 바로 하자 쇳소리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오래 여기에 누워있었을까. 그는 간간이 피로 엉겨 붙은 머리에 꼬이는 파리를 쫓아내며 예배당 앞쪽에 자리한 여신상 아래의 제단을 바라보았다. 흡혈귀가 되었으면 이곳에 살아야 하는 건가? 터벅터벅 울리는 소리가 먼지와 함께 낮게 깔린다. 창문이 없어서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제단 위에는 금으로 된 잔이 놓여있었고, 그 안에 검붉은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곳이 흡혈귀의 거점이라면, 어떤 의식을 하려다가 습격당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 액체를 보자마자 다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반문이 들지 않는 것까지가 그가 그의 삶을 새로이 받아들였다는 의식과도 같았다.

그는 가끔 자신의 정체를 의심스러워했다. 사람을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좋아하게 되는 자신의 성향이 과연 사제 같은 것과 어울렸을까?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때도 그랬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굳이 자신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어느 구역 어느 교회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흡혈귀가 된 자신을 보면 죽이기야 더 할까. 그는 거대한 야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주어진 하루에 만족하며 살 줄 아는 성격을 가진 흡혈귀로 살았다. 200년 가까이 충실히 살은 흡혈귀라니, 인간의 몸을 가진 어떤 사제보다도 그의 경력이 길 것이다. 그는 꽤 규칙적으로 살았다. 예배당으로 해 뜨기 전에 가고, 해가 지고 나면 근처에 숙소용으로 붙어있던 뒤쪽 건물로 가고, 가끔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는 숲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꽤 멀리 있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먹을 것도 한동안 끊임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그에게 웃겼던 점은 숙소 지하실에 이미 먹이를 감금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이곳은 흡혈귀의 거처로 쓰였을 것이다. 그건 아마 깨어났을 때 보았던 흡혈귀 중 하나일 것이고, 어쩌면 둘 다의 보금자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이라, 이곳에 다른 흡혈귀를 들인다….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싸우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먹이 중에도 같이 오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때까지 대체로 지하에서 묶어두고 먹이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지만, 누군가 먹이 이상의 생활 반경에 있었으면 하고 바란 뒤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그런 방식을 시험하게 되었다.

그의 생에는 찰나였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색가는 그와 함께 꼬박 2년을 살았다. 1970년대의 봄이었다. 그는 완전히 집 밖으로 나갈 순 없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지상에 올라와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남자가 지상에 올라온 것과 두 명이 표면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것은 시기가 비슷했다. 그는 이반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로 꽤 즐겁게 해주었다. 바깥의 기억이 없는 그에게 멋진 여행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가끔은 진짜 있는 곳인지 모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이반은 그를 꽤 사랑스러워했고 기꺼워했으며 흡혈하는 횟수를 가능한 한 줄여서 그와 오래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흡혈귀가 스스로 쇠약해졌을 때, 느슨하게 유지되던 계약을 정원의 수반으로 깨부순 것 또한 그 남자였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멀쩡히 일어나 다가오는 그를 보는 눈빛이 이반에게는 꽤 오래가는 상처를 입혔다.

피를 모조리 빨아 그에게 어쩌면 영원히 자신의 양분이 되게 한 이반 래빗은 그 이후에도 딱히 먹이를 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웬만한 완력으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뿐더러, 그 이후의 계약은 세뇌를 강하게 해서 지하실 문을 열어둔 상태에서도 먹이를 자발적으로 지하에만 머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근처 마을이 도시로 발전해 교회가 있는 외곽까지 오는 사람들은 그리 젊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마음이 가는 누구와도 기꺼이 가깝게 지낼 수 있었지만, 흡혈행위를 동반한 그와의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병약했던 클로이, 쇼크사한 엘리나. 그의 마음처럼 흡혈귀의 반려가 될 만한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뭐, 그렇겠지. 그는 몇 번인지 모를 기원을 속으로 올리며 최근에 쇠약사한 먹이의 소지품을 교회 2층에 있는 창고에 장식했다. 이곳은 그가 먹은 사람들의 소지품들을 가져다 두는 곳이었다. 지난 200년 동안 꽤 많은 사람이 지하실을 거쳤기에 그들의 소지품이 모여있는 이곳은 특정 시대의 인류사 박물관과 비슷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들 모두와 잘 지낸 것은 아니다. 계약이 성립되어 세뇌가 걸렸음에도 이반만 보면 소리를 지르던 사람도 있었다. 외부에 들킬까 봐 얼른 먹어 치워야 했다. 그렇게 때아닌 과식을 하면 며칠 동안 누워서 잠만 잤다. 그것이 자기혐오인지 포만감에 수면을 취한 것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고 이반은 정신이 들면 다시 예배당으로 가서 그곳을 관리했다. 교회의 옆에는 큰 여신상이 있는데, 이반은 이것이 무슨 종교인지도 가늠이 가지 않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라면 알고 있었겠지만, 그가 깨어났던 곳에는 딱히 임무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아마 세간에서 잘 알려진 종교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진짜 종교가 아닐 수도. 이곳은 본인 이전에도 흡혈귀가 관리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종교 종류를 막론하고 교회가 필요한 사람들을 꾀어내는 장소로 기능하는 듯도 했다. 어찌 됐든 이반 래빗은 이 교회의 사제였고 그것도 200년 넘게 이곳을 섬겨온 관리자였다. 그는 예배당과 정원에 있는 여신상을 동료라 생각하기로 했다.

도시의 발전은 계속 되었고, 현대의 행정이라는 것은 그에게 꽤 귀찮은 삶의 방식을 선사했다. 그는 꽤 정기적으로 교회를 소개하거나 전산에 등록하고 싶어 하는 주소 수집가-그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에게 세뇌를 걸고, 가능한 숲을 울창하게 가꾸었다. 만약 여기에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날이 온다면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할 수 없었기에 가능한 교회를 감추려고 했다. 다행히 이 오래된 깊은 숲은 가치가 작었는지 발전이라는 벼락에서 번번이 피해 갔다. 그가 걸었던 세뇌가 걸린 말단 직원들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디선가 구해온 TV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그와 그 교회가 있는 숲을 제외하고는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이 세기말을 운운하며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그날은 폭풍우보다 심한 비바람이 치는 밤이었다. 이반 래빗은 나름 오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은 것 같았다. 당분간 해가 뜨지 않을 것 같은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바짝 마른 시체로 나간 사람이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았다. 슬슬 먹이가 찾아와 주지 않으려나,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음식들을 다시 먹을 생각을 하며 청소를 마친 그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아마도 며칠은 무리겠지. 이런 날씨에. 제단을 돌아보자 눈을 감고 있는 여신상이 보였다. 응, 여신님. 뭘 관장하는지 알 수 없는 내 오랜 친구여. 당신의 유일한 사제인 내가 살아있어야 정기적으로 당신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주는 사람이 존재할 텐데. 이반은 기도인지 밥투정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빗자루를 구석 벽에 세웠다. 쓸쓸하다는 감정은 거의 느끼지 않을 만큼의 긴 삶이었지만, 이런 날씨에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TV를 좀 줄여야 하나?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 인간들의 삶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으므로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에게는 앞으로도 누군가 나타날 것이고 그것이 맞지 않아 쉽게 사라질 인연이라고 해도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향수심인지 알 수 없어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것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아, 감자라도 먹고 얼른 자자. 생은 계속되고 언젠가 날씨는 갤 것이며 누군가는 삶의 마지막을 내게 주러 올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고 뒷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창문도 없는 이 석조 건물에서 먹먹하게 울리는 묵직한 소리였다. 마치 예배당 안에, 천둥이 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