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칠 일이면 (창7:1-5)

요즘 기업들은 전문 경영인을 모시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추세입니다. 물론 아직도 창업주와 그 일가가 기업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전문 경영인 체제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전문 경영인에게 권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을 아주 강하게 묻습니다. 이사회와 주주총회가 전문 경영인에 대한 경영 압박을 심하게 합니다. 경영 실적을 내라고 하고 판매 실적을 요구합니다. 경영 실적이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경영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판매 실적이 부진하면 그때부터는 심각한 압력을 받습니다. 전문 경영인들 사이에 자조 섞인 이야기로 흘러다니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 개의 봉투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어떤 전문 경영인이 기업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네를 위해서 책상 서랍에 봉투 세 개를 준비해 두었네. 기업을 운영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그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게나. 그러면 크게 도움이 될 걸세." 후임자는 전임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맡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첫 번째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위기가 닥치자 그만 전임자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니 정말 봉투 세 개가 있었고 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1번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전임자를 비난하라."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구나, 전임자를 비난하면 위기를 넘어갈 수 있겠구나.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 저는 저의 경영 철학을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습니다.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일어난 모든 위기는 전임자 탓입니다.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시고 전권을 주시면 한번 반등의 요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사회가 들어보니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권을 줍니다. 반등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라."

역시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요소요소마다 전임자가 심어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적 쇄신이 되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가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이사회가 생각해 보니 또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대규모 인적 쇄신의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승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는 승진에 대한 열망으로 질서가 잡힙니다. 사람이 바뀌자 단기적인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공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세 번째 위기가 닥쳤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위기와는 중량감이 전혀 다른 아주 심각한 위기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세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제 당신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봉투 세 개를 준비하십시오."

사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가 회자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책임감을 상실한 시대라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창업주라면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기업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겠습니까? 전임자를 비난하고 사람을 바꾸고 하다가 안 되면 떠나버리는 그런 식으로 회사를 경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 넣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살리려고 발버둥치고 애를 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감이 없습니다. 책임감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당연히 책임감이 생기게 됩니다.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책임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책임지고 싶어 하시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도 하나님의 책임에 동참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 곁에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나머지 일곱 식구도 다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노아의 일곱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게 된 것은 노아 덕분입니다. 노아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에 그는 의로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식구에 대해서는 성경의 평가가 유보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노아라는 큰 나무 그늘 아래 나머지 일곱 식구들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노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곱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노아가 살아왔던 시대의 영적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텅텅 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부탁받은 방주 언약을 120년 동안 힘써 지켰습니다. 다 준행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믿음의 일꾼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1-1. 라합의 믿음

성경에 보면 훌륭한 믿음의 거인과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이 그 사람 덕분에 은혜를 입은 예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또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다면 라합입니다. 라합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여리고 성의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자라났을 때는 하나님 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듣자니 강력한 제국 이집트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고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하더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라합에게 믿음이 자랐습니다.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그 시대의 잡신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이 하나님이야말로 신 중에 신이고 내가 정말 믿고 의지해야 될 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만 오면, 나에게 한 번만 기회가 오면 나는 이 신앙을 꼭 붙들고 놓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여관에 두 명의 정탐꾼이 들어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었습니다. 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결정의 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날에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려 주었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겨 주었음이더라

라합 덕분에 라합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그에게 속한 모든 재산, 심지어 가축과 동물들까지 다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스스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하나님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라합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은혜의 부스러기를 먹고 그들도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놀라운 특권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무척 중요합니다. 노아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중요하고 라합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우리 믿음의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훌륭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보디발과 그의 아내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은 요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