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읽은 바로는

번역가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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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OUND

프랑스문학, 영미문학 번역가. 야스미나 레자의 『행복해서 행복한 사람들』 『함머클라비어』,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슬픔이여 안녕』,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여자의 빛』,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녹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창백한 언덕풍경』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의 프랑스식 서재』 『사라지는 번역자들』을 썼다.

“내가 이제까지 읽은 바로는 아름다운 문장은 깊은 생각을 이길 수 없고,

문학의 재능은 고독 속에서 쓰고 있을 때에만 피어나는 듯하다.“

번역가 김남주는 ‘번역가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기에 충분한 몇 안 되는 번역가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깨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학, 특히 프랑스문학에 끌렸다. 보들레르, 발레리, 엘뤼아르의 시와 카뮈, 사르트르, 라디게의 소설을 읽었는데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우리말로 된 작품을 읽는데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맞닥뜨렸고, 내용과 문맥, 단어, 문화적 차이 같은 것들을 살펴보다가 일단 저자의 언어로 읽어보기로 했다.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고,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결국 문학 공부의 첫걸음은 원전 읽기라고 생각하고, 서너 계절 동안 심지어는 수업을 빼먹기도 하면서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졸업하고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다가 동화책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속도가 느린 편이어서 일이 밀리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번역자가 되었다.

번역가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

이제까지 번역한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하루 한 걸음!”( 『두 늙은 여자』, 벨마 월리스)이다. 덤덤하고 시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들’이 그냥 내 삶인 듯하다. 나는 미루기를 밥먹듯이 하는 인간이라 마감이 닥치면 진한 커피를 마시며 자주 밤을 샌다. 평소에는 아침에 일찍 깨서 커튼만 젖히고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빈둥거린다. 안 풀렸던 일, 해결되지 않은 문장, 스쳐 지나간 음악, 후회, 안타까움, 그리움이 희붐한 아침 빛 속에서 교차한다. 꽤 중요하다 싶은 생각들도 반짝거리고... 이 시간이 가장 나와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나서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점심 때까지 대개는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쓴다. 다른 일처리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오전의 고요함은 외부의 어떤 방해로부터든 이기적으로 지키려고 애를 쓴다. 점심식사는 정성 들여 다채롭고 즐겁게 만들어서 천천히 먹는다. 어울리는 포도주나 맥주도 곁들이고, 후식도 달콤하고 다양하게 챙긴다. 오후 시간은 집안일, 바느질, 요가, 영화, 음악, 수다... 가끔 외출 같은 것들로 지나가버린다.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어두워지면 다시 일을 하고 뉴스를 보고 책을 읽다가 잠을 청한다. 누구나 삶의 어느 시기에 정신없이 바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시기를 지나와서인지 느릿한 하루가 고팠다. 그래서 최소한의 밥벌이만 하고 별거 없고 별일 없이 보내는 요즘의 하루가 참 좋다.

보통 특정어에 국한된 번역가가 일반적인데 프랑스와 영미 문학 전문 번역가로 살아오셨다. 두 언어를 오가는 번역이 어떻게 가능한지, 두 언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두 언어에서 생겨난 문학의 DNA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번역은 우선 ‘읽기’에서 출발한다. 읽고 이해하면 출발점에 설 수 있다. 그런 다음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 정말 실력이 뛰어난 분들이 계신데 나는 결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사실 문학의 경계는 언어나 국경별로 나뉘어지는 게 아니어서 좋아하는 작가들이 프랑스 문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든이나 셸리, 블레이크, 테드 휴즈의 시나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챈들러의 서간집을 영어판으로 뒤죽박죽 읽곤 했다. 한때 도스토옙스키에 빠졌었는데, 러시아어를 모르니 영어판으로 읽기도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둘 다 로만어에 속해서 어원이 같은 게 많으니까. 프랑스어는 성수를 일치시켜야 하는 점이 좀 다른데 그래서인지 내가 느끼기에는 문장의 구조적인 느낌이 좀 다르고, 우리말 표현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두 언어에서 관계대명사는 문장을 마술처럼 한정해주고 연결해주는 구실을 한다. 굉장히 매력적인 기능을 가졌다. 읽고 이해하고 나면 표현해야 하는데, 여기가 바로 번역의 시작이다. 결국 도착어 실력이 있어야 좋은 번역이 나온다고 본다. 우리말을 적확하고 아름답게 할 줄 알아야 하는 거다. 사실 난 영어 번역을 이시구로 외에는 별로 한 게 없다. 출판사에서 이시구로를 나에게 보낼 때 “분위기가 맞을 것 같아서”라고 했는데, 정말 이상하게 문장이 잘 맞았다.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듯이, 실타래가 솔솔 풀리는 것처럼. 몇 년에 걸쳐 다섯 권을 번역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이시구로는 절대 인기 작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너, 일본어도 하니?”라고 물었을 만큼 일본 작가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었고. 오랫동안 영미문학을 번역해오신 분들이 많은데, 그냥 좋아서 몇 권 번역한 이시구로가 뜻밖에 노벨상을 받아서 뭔가 좀 민망하기도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열심히 하는 타입과 타고난 타입”이라는 두 타입의 작가가 있다고 했다. ‘열심히’ 타입의 작가와 ‘타고난’ 타입의 작가는 어떻게 달랐나?

다른 분야에서도 수재형이냐 노력형이냐, 유전이냐 양육이냐 하는 논란이 있듯이 예술 분야에서도 그렇다. 두 타입 중 하나에 꼭 우열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타고난 작가라도 하지 않는다면, 혹은 타고나지 않은 작가라도 열심히 한다면 길이 엇갈리겠지. 하지만 타고난 작가가 어떤 이유로든 열심히 한다면 그걸 당할 수 있을까? 문학에 대한 사랑이든, 도박이든, 명예욕이든, 애국심이든 이유는 상관없다. 시샘, 질투, 감탄, 경외를 넘어 도스토옙스키, 플로베르, 윌리엄 트레버, 솔 벨로 앞에서는 같은 인간이라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워진다. 내가 이제까지 읽은 바로는 아름다운 문장은 깊은 생각을 이길 수 없고, 문학의 재능은 고독 속에서 쓰고 있을 때에만 피어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