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미완성

심완선 SF평론가


#손씻기 #개운開運 #우울은수용성 #빈틈 #빈칸일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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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는 것은 생산적일까요. 경험상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작가는 글을 쓰다 막히면 꼭 양치하러 일어난다고 했어요. 혹은 공부하기 싫을 때 운동하고 씻고 나오면 그렇게 의욕이 되살아난다지요. 오래전에 읽었던 에세이 중에는 자신은 샤워할 때 창의성이 넘치고, 그 시간 덕분에 반짝이는 생각으로 가득해진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손 씻기도 마음을 개운하게 하죠. 마작 같은 게임을 할 때 운이 나쁘면 손을 씻으러 가라더군요. ‘개운開運’하라고요. 정말 운이 트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분 전환은 되겠지요.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농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씻으면 신기하게도 무거운 감정이 같이 씻겨 내려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연쇄를 싹 쓸어버리는 효과도 있죠. 우리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흐름을 끊고, 머리를 비움으로써 도리어 가득 차오를 준비를 합니다. 생기, 활력, 의욕, 창조성, 무엇보다 가능성이 들어찰 자리를 만들어요. 그래서 생활하고 작업하는 사이사이 일부러 빈틈을 두어야 하는 거죠. 잘 비워야 잘 찬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창작물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수없이 회자된 이유는 작품의 완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평을 보셨나요? 작품에 빈틈이 많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할 말이 많아졌다는 거죠. 움베르토 에코는 『책의 우주』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햄릿은 걸작이 아니라 “그 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원천들을 조화롭게 정돈해 내지 못한 산만한 비극”에 불과하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것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묻고” 빈틈을 채우려고 합니다. 덕분에 새로운 해석이나 재창작이 활발히 이어지죠. 반면 매끄럽게 완결된 작품에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어요. 일상에서도 자주 생기는 일입니다. “인터넷에서 조언을 많이 받고 싶다면 일부러 잘못된 주장을 해라”처럼요.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 빈칸이 많은 이야기는 손쉽게 수용자의 반응을 끌어냅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어떤가요.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자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이렇다 할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도 많겠죠. 아니면 일찌감치 주제나 방향성을 뚜렷하게 확정했을 수도 있고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순탄하게 내용을 결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번하게 장면을 전환하며 나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느끼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더는 새로울 것 없이 이대로 끝날 거라고요. 다들 성격도 상황도 다르니까요. 남이 무어라 할 순 없지요. 다만 이것만은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떤 책이든 낙서할 여백,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마련할수록, 또 다른 이야기가 태어날 공간이 늘어난다고요.

저는 올해 정말 몇 년 만에 텅 빈 시간을 누렸습니다. 한동안 일정표를 깨끗한 빈칸으로 만들었어요. 중간을 툭 끊어냈죠. 정해진 일과라면 기껏해야 어느 평화로운 게임에 접속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들어가서 동물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채집을 하거나……. 하루는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씻고 나와서 바나나 우유 마셔야지. 그리고 오늘의 나무 열매를 따러 가야지.’ 마치 한창 여름방학을 즐기고 있는 어린이 같았죠. 내일이나 내년을 걱정하지 않았어요. 하루하루가 새것처럼 지나갔습니다. 사실 실제 어린이들은 훨씬 복잡하게 지낼 테죠.

덕분에 한동안 일을 많이 못 했습니다. 게으르다면 게으른 생활이었어요. 바보 같다면 바보 같고요. 나중에는 밀린 방학숙제를 개학 직전에 몰아서 해치우듯 끙끙댔거든요. 그래도 개운해졌어요. 불안이나 초조함을 한 번 싹 씻어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이때쯤이 즐거운 장면으로 남을 것은 확실해요. 이왕이면 개운開運도 했다면 좋겠네요.

영어 ‘refresh’는 번역하자면 상쾌하게 만든다는 뜻이죠. ‘상쾌하다’는 또한 시원하다, 산뜻하다, 가볍다, 깨끗하다, 새롭다, 기분이 좋다는 뜻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휴식의 속성이겠지요. 여러분도 자신을 옥죄는 것을 싹 쓸어내고, 깨끗하게 빈 시간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미완성 상태를 즐겨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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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 (SF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단행본으로 『아무튼, 보드게임』,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우리는 SF를 좋아해』, 『SF는 정말 끝내주는데』를 썼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 이외에 《어션 테일즈》, 《기획회의》, 《한국일보》,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채널예스》, 《아르떼》 등에 글을 연재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SF 보다》 시리즈의 기획위원이며, 《문학웹진 림》에 SF 비평 대담 ‘이인삼각 SF’를 연재했다. 칼럼, 리뷰, 비평, 해설, 대담, 인터뷰, 강의 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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