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랑할 수밖에

작가 고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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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리

사람과 삶에서 글을 배운 사람, 모든 질문의 답은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 KBS 〈인간극장〉 방송작가로 일했다. 특별할 것 없는 삶에도 이야기가 있음을 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를 썼고, 동아일보 칼럼 〈관계의 재발견〉을 연재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발견하길 바라며 ‘창비학당’ 등에서 글쓰기 안내자로 활동한다. 브런치 @daljasee, 인스타그램 @suri.see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고, 누구에게나 살아 있기 잘했다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늦여름, 고수리 작가의 책을 손에 쥐고 다가올 겨울을 기대해봅니다. 어느 새벽, 눈이 내리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전해질 작가의 온기를 느껴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밤이 옵니다. 눈이 내립니다. 모두가 소프라노로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알토’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고수리 작가의 위로를 당신에게 전합니다. 엄마가 천천히 오래 쑤어준 따뜻한 흰 죽 같은 글의 모음. 어둠 속이 너무 희미해 잘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나요. 걱정 마세요,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소망해온 작가가 되었다. 스물일곱에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 막내작가로 살고, 그리고 몇 권의 책까지… 작의 삶을 살아보니 어떠한가?

2015년에 첫 책을 내고 6년이 지났다. 작가라는 일,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잘 맞는 것 같다. 나 혼자 시간과 능력을 설정하고 배분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할까. 사실 두 번째 책까지 작가라는 정체성 혹은 호칭이 어색했다. 그러다 세 번째 책을 내면서 아, 내가 (전업) 작가구나, 열심히 써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하게 그때부터 글에 관한 일들이 들어왔다. 신문 칼럼을 쓰고, 연재를 하고… 책을 한 권씩 낼 때마다 들어오는 제안이 달라지고, 글쓰기 강연이 들어오고. 지금은 매일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초판과 달라진 건 무엇인가?

처음 쓴 글은 너무 솔직했다고 할까. 책을 내고 다시 읽어보니 ‘아, 책을 내고 싶어서 정말 조급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 도대체 어떻게 책을 냈고, 어떻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거지? (웃음) 젠더 감수성, 사람을 향한 연민, 그리고 내 글로 인해 혹여나 상처받는 사람은 없을까를 기준 삼아 수정해나갔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도 들어냈다. 그 시절 고수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우울과 연민,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감추기 위해 명랑하고 씩씩했음을 새삼 느꼈다. 좀 더 나이 든 입장에서 바라보니 그 시절 분투했던 내가 조금은 예뻐 보였다고 할까. 그 달라진 마음을 바탕 삼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긴긴 미움이 다다른 마음’ ‘꿈에 카메라를 가져갔어’ 등 세 편을 추가했다.

글쓰기 안내자로서도 사랑받고 있다. 사람 보는 눈, 사랑 보는 눈, 꿈 보는 눈, 삶 보는 눈이 선명하고 너그러워져서 내가 보고 싶고 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들을 글로 쓰게 하는 좋은 선생님일 것 같다. 고수리만의 글쓰기 수 특징은 무엇인가?

잘 들어준다. (웃음) 직업적으로 수많은 취재와 수업을 이끌어봤지만 경청보다 훌륭한 기술은 없었다. 잘 경청해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쓰는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에는 모두들 주저한다.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 재촉하지 않고 잘 들어준다. 3회 차 즈음부터야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배우처럼 몰입한다. 아이컨택트를 하고 눈으로도 이렇게 말해준다. 믿음! 괜찮아요. 나는 무조건 당신 편이에요. 어떤 이야기든지 들어줄게요. 당신에겐 이런 장점이 있군요… 전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으로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글이 쓰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단 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마음 놓고 솔직한 이야기를 쓰고 나눌 수 있도록 안전한 글쓰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잠시나마 손바닥에 머무는 조금의 온기 같은 이야기들’. 책 띠지 카피가 눈에 들어온다. ‘고수리다움’을 제대로 포착했다고 할까. 사소함, 평범함, 다정한 위로, 엄마… 고수리의 글은 담담히, 동시에 과감하게 나를 고백한다. 고수리에게 ‘글(쓰기)’이란 무엇일까?

계속 쓰는 일. 어떤 작가든지 첫 책은 좋다. 살아오며 꾹꾹 눌러 응축한 이야기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나의 첫 책 역시 그랬을 테고. 물론 지금의 고수리는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글로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작가들은 판매를 의식하지만, 나는 꾸준한 내 글에 반응이 오는 지금이 좋다. 첫 책에 고여 있던 욕심을 덜어낸 지금, 한 장면 한 장면 꾸준히 쓰는 매일이 좋다. 5부작 휴먼다큐드라마 〈인간극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일상을 기록하고, 한 장면씩 이어 붙여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처럼. 매일 꾸준히 기록하다 보면 담담하지만 울림 있는 사유를 만날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