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는 항상 나를 도와줬지.

지금 생각하니 그랬다. 내가 몰래 피를 빨아 먹으려 했을 때도 나에게 순순히 피를 나누어 주었고 나를 죽이러 온 사냥꾼 앞에서는 나를 두둔 했다. 물약 상인 앞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막아주었고 나를 위해 악마를 죽여주기도 했다. 너는 신기하게도 그걸 다 해줬어.

그래서 나는 네 옆에 있으면 항상 좀 더 나은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네가 도와주고 날 존중할 때마다 나도 어쩌면 소중한 걸 가져도 되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런 낯선 기분이 쌓이고 쌓이자 나는 조금씩 너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제물이 되는 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너와 꿈꾸었다.

하지만 카사도어의 손짓 하나에 나의 몸은 내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난 마치 맞는 홈에 끼워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제단에 올려졌다. 제단에 오르자 마자 느꼈다. 나의 힘이 빠져나가고 육신이 붕괴되어 가는 걸. 이곳에 붙잡혀 있는 이상 나는 죽은 목숨이다. 아니, 절대로 카사도어의 뜻대로는 되지 않게 하리라, 나의 연인이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내 인생이 그러면 그렇지, 항상 그랬어. 중요한 순간들에 아주 이상하게 돌아갔지… 신들과 운명은 항상 나의 편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말해줘야 한다. 너는 그냥 운명을 거스르려 노력한 불쌍한 새끼라고… 너는 최선을 다했지만 나를 싫어한 신과 운명은 이기지 못 한거야. 누가 이길 수 있겠어 그런 걸, 대체 누가…

운명이 나의 패배를 선고 했다. 그리고 칠천 명의 뱀파이어에게도 죽음을 내려주었다. 운명의 의사봉이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곧 나의 차례다. 끔찍한 고통과 나를 억누르는 무형의 힘을 뚫고 마지막 말을 전해줘야 했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죄책감 가지지 마? 젠장, 그딴 착한 말은 내가 해줄 말이 아니었다. 젠장 젠장, 마지막의 마지막. 그런 때에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그 순간 너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찰나의 행운.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그 말을 해줘야겠지.

나는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 짜 말했다.

“나는, 너를….”

그리고 운명은 끝까지 아스타리온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터져나갔고, 카사도어의 제물, 뒷골목의 좀도둑, 이런저런 불쌍한 인생들의 납치범 아스타리온은 그렇게 볼품없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