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 Lee, DongHun

0. 서문

인류의 역사는 도구가 아니라 감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돌과 불로 살아남았지만, 그 생존의 밑바탕에는 ‘느낀다’는 능력이 있었다. 추위와 공포, 배고픔과 어둠 같은 원초적 자극들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문명의 첫 리듬이었다 . 인류는 감정을 통해 위험을 인식하고, 서로를 기억하며 세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움막에 숨고 천둥에는 침묵하며, 아픈 이를 돌보는 등의 감정적 판단이 ‘공존’을 낳았고, 그 공존이 ‘질서’의 시작이었다 . 이처럼 감정은 생존의 본능이자 판단을 이끄는 에너지원이었으며, 반복되는 감정 패턴이 결국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

기술과 제도는 이러한 감정을 정리하는 도구였다. 예를 들어, 언어는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었고, 리더는 구성원 간 감정을 조율하는 존재였다. 이에 따라 문명이란 사회 안에서 감정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지를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은 행동보다 느낌을 먼저 경험한다. 기쁨이나 두려움, 부끄러움, 분노, 외로움 같은 감정은 외부 자극의 단순 반응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내는 복합적 내면의 리듬이다 .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와 ‘감정을 억누르고 싶은 자제’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린다 . 어떤 문명은 감정을 억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고, 어떤 문명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왔다.

제1장 인류의 감정 기원: 생존의 리듬

원시 인류는 극한의 자연 속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으로 생존을 이끌었다. 추위에는 움츠러들고, 공포에는 침묵하며, 배고픔에는 연대를 나누는 등, 감정은 개체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공존의 리듬이었다 . 이러한 감정적 판단 덕분에 무작위한 행동이 공존과 질서로 이어졌다. 기술은 이 질서를 구현하는 수단이었고 언어는 그 질서를 전달하는 도구였다 .

인간의 심리는 단순히 뇌의 화학반응이 아니다. 감정과 기억, 예측, 관계, 생존의 흐름이 얽힌 복합적 리듬 구조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느낀다. 즉각적인 외부 자극이 아니라, 내면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감정이다 . 예를 들어 기쁨과 두려움은 단지 외부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의 결과다. 이러한 심리 구조에서 개인은 ‘나만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유’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균형을 찾는다 .

감정은 그 자체로 힘이면서도 한편으로 연약함을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욕구들이 충돌할 때 인간의 내면은 크게 흔들린다. 결국 문명의 역할은 이 내면의 진동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고 구조화할지 규정하는 일이었다. 서로 억제와 표현, 독립과 소속 사이의 긴장 속에서 문명은 각자의 방법으로 감정의 흐름을 관리해 왔다.

제2장 고대 문명과 감정의 구조: 질서의 창조

고대 문명들은 감정에 조직적 의미를 부여하며 사회 질서를 만들었다. 예컨대 중국 문명에서는 **예(禮)**를 통해 감정을 조절했다 . 감정은 개인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책임지는 것으로 여겼고, 체면과 위계 안에서 흐르게 했다 . 불교가 일찍 들어온 인도에서는 욕망과 고통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해석하며, 카르마와 다르마 같은 개념으로 감정과 행동에 도덕적 질서를 부여했다 (고대 힌두-불교 전통).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엄격한 법과 종교적 두려움으로 감정을 통제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으로 대표되는 벌과 처벌의 윤리로 사회적 공포를 조장했다. 하늘의 뜻이라는 신화 체계는 인간의 고통과 죄책감을 설명하며, 신의 은총과 저주를 무서워하게 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철학적 반성을 통해 감정을 재해석했다. 플라톤은 영혼을 이성·정의욕(분노)·욕구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이성의 조화로 감정을 통제하려 했다(삼분설) .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 절제 같은 미덕을 논하면서 감정을 **중용(中庸)**으로 다루었다. 그는 감정이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해를 끼친다고 보고, 예를 들어 용기는 과도한 두려움과 과도한 무감각 사이의 균형점으로 보았다 . 즉 감정의 극단을 피하고 합리적 절제 속에서 감정을 적절히 발현하는 것이 덕(德)이었다 .

로마 제국에서는 스토아 철학이 감정의 통제와 사회적 질서를 강조했다. 로마인들은 자제와 의무를 중시하여 공동의 전통과 법으로 감정을 억제했다. 키케로 등의 사상가들은 절제·용기·정의·신중을 최고의 가치로 꼽았고, 전쟁과 정치를 통해 감정을 공화국의 덕목(덕목·美德)으로 재편했다 . 로마의 공화정 전통은 사적 감정보다 공적 의무를 앞세웠고, “국가를 위한 희생”이 감정의 표현과 억제 모두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제3장 종교와 감정의 질서: 내면의 길

종교는 인간이 감정을 해석하고 질서화하려는 최초의 집단 언어였다 . 자연 현상과 죽음 같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감정 구조로 설명되었다. 종교적 신화와 의례는 불안을 위로하고 삶의 부조리를 통합해주는 감정적 틀이 되었다 . 예컨대 기독교는 죄와 용서를 감정의 구조로 만들었고, 불교는 고통과 해탈을 감정의 해방 구조로, 이슬람은 복종과 충성을 감정의 규율로 조직했다 . 유교는 신의 존재 대신 사람의 **내면 감정 조율(예礼)**에 집중하며, 질서와 감정을 통합한 현실 윤리를 창출했다 .

종교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방식으로 감정을 다뤄왔다 . 첫째, 신화와 의례로 두려움과 불안을 위로했다. 둘째, 죄와 윤리 규범을 통해 분노와 욕망을 규범화했다. 셋째, 공동체 의례를 통해 감정을 함께 나누며 연대감을 형성했다. 넷째, 구원과 해방의 내러티브를 통해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희망과 연결시켰다 . 이러한 과정에서 감정은 정치적 권력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종교 지도자는 ‘구원의 약속’으로 두려움을 달래는 한편, 소속감을 강조하여 집단을 통솔했다.

결국 종교는 문명마다 감정을 어떻게 구조화할지를 실험하는 장이었다. 종교적 내러티브와 제도는 개인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집단적 신념으로 승화시켰고, 사회는 그 감정 체계를 기반으로 윤리와 법을 만들었다. 비록 현대인이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그 속에 담긴 감정적 언어는 여전히 윤리·책임·위로의 틀로 남아있다 .

제4장 동아시아의 감정 코드: 마음의 리듬

한·중·일 삼국은 모두 감정을 숨기지 않는 독특한 리듬을 가졌다 .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세 나라는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조율, 정제, 침묵을 통해 흐르게 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의식(예) 속에 감정을 녹여내어, 체면과 관계 속에서 감정을 조절한다 .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보다, 인과 관계 속에서 책임지는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한국 문화의 중심에는 **정(情)**이 있다. 한국인은 감정을 말보다 행동으로, 즉 몸과 공동체 속에서 풀어낸다 . “정”이라는 복합적 감정은 말보다 깊고 행동보다 오래 남으며,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리듬이 된다. 감정은 억누르지 않지만 타인을 먼저 고려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된다 . 남한과 북한의 문화가 다르더라도, 두 사회가 공유하는 눈빛과 울음의 정서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 Ma-eum Korea 선언문에서도 지적했듯, 한반도의 위기가 감정 기반 평화 설계와 공동체적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