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달 아니 반년간 어 이거 블로그에 써야지.. 라고 생각해놓고 한 문장도 적지 못한 것이 수두룩 빽빽이다.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영원히 미루는 버릇을 삼십대에는 고쳐야지 결심한다. 무슨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그래봐야 누가 읽는다고.. 내가 유희로 삼는 많은 일들이 그 최선을 위해 끝도 없이 지연되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로 변했다가 결국은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지 말고 대충 대충 자주 남기기로 마음 먹었다.

(실은 내 블로그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어 주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 자신이 내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나는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자 할말이 없어서 잠정 포기했다.)

북한산 생활의 마무리

3주 후에 이사를 간다.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북한산 자락의 동네에 산지 5년 째, 녹지와 낮은 인구밀도와 평온을 포기하고 좀 더 문명 가까이 살기로 했다.

강아지가 생기고 나니까 외출이 힘들어졌고, 문화 생활과 더 멀어졌다. 지금 사는 집에서 (멀티플렉스가 아닌)극장까지 대략 한 시간 거리.. 왕복 두 시간.. 러닝타임 2시간 짜리 영화 보면 4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그 사이 강아지는 쉬 마려운 거 참으면서 나를 기다린다! 그래서 극장 미술관 도서관에 못 가고 보낸 시간이 어언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은둔 생활을 포기하고 조금 더 북적이는 곳으로 간다. 그래봤자 보통의 서울 사람들이 교통 불편하다고 못 사는 동네기는 한데. 어쨌든 지금보다는 극장과 마트와 식당이 가까운 곳으로 간다. 원두를 택배로 주문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간다. 지금 사는 집에서의 시간이 한 달도 안 남았다. 내가 살았던 곳 중에 가장 불편하고 가장 평온한 집이었다. 떠나자마자 그리워지겠지만 다시 돌아올 생각은 아마 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아마도 평안보다 편의에 더 쉽게 길들여지는 듯하니.

상반기에 재밌게 본 책 영화 드라마(근작)

<콩트가 시작된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

<키미>

<졸라>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이 중에서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랑 <졸라>는.. 힙하다거나 도프하다거나 그런 표현 쓰고 싶지 않은데 그치만 또 세련되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은 감각이 있다. 둘다 흑인 여성 필름메이커의 작품이고 어떤 첨단에 있는 느낌이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는 기획과 각본과 주연 배우를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리백>이랑 <애틀랜타>와 비교해보게 되기도 했는데(하는 이야기는 다 다르지만)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가 압도적으로 좋다. 언젠가 메모해 놓은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피해자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입체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더 많을수록 어떤 이야기가 강력해진다. 나는 강력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쉽게 깨질 수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그 이야기가 쉽게 뒤집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이 그 쉽게 뒤집어지지 않는 강력한 이야기에 딱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아픈 여자 이론

또 최근에 읽고 무릎을 팡팡 친 글은 고은 언니가 추천한 것으로..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이다. 작년 연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컨디션이 확 나빠져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요상함의 근원이랄지 간지러운 곳 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엄청난 글이었다. 한때 운동을 삶의 낙으로 삼고 데드리프트 60kg 친다고 뿌듯해하고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아주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상태였고.. 비실비실 축축 처지는 모드가 실은 나의 기본형이라면 어쩌지. 그럼 그게 내 잘못일까? 하는 의문으로 작년 연말 매일매일 서러웠다. 기분 처지면 후딱 일어나서 웨이트 하러 가는 건강맨들에게는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너무나 외로웠고 말이다. 그랬는데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서 이거야 임마.. 하고 구해주는 기분이었다. 읽어보시길. 비슷하게 최근에 쫌쫌따리 읽고 있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도 평범한 정신질환에 주목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우울증은 날씨 같은 현상이 아니고, 이제는 날씨조차도 자연 현상이 아닌 정치적인 결과라는.. 중요한 얘기. 아무튼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 전문은 여기에.